[중세교회사]2강: 중세의 교회와 사회

관리자
2025-02-26


2강:  중세의 교회와 사회

 

 

1. 서론적 질문: 중세 서유럽을 떠 받치고 있었던 두 개의 기둥이 교회와 사회라면, 교회를 대표하는 제도와 사회를 대표하는 시스템은 각각 무엇일까요?

 

 교회와 사회의 제도 및 운영 시스템을 비유로 말하자면, 교회는 Windows와 같은 중앙집권적 체제로, 사회는 Mac OS와 같은 지방분권적 체제로 볼 수 있습니다. 동방과는 차이를 보이지만, 서방 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구조로, 사회는 왕이나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었습니다. 교회는 교황제도를, 사회는 봉건제도를 기반으로 한 피라미드형 계층질서 속에서 유지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황제도를 알면 중세교회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고, 봉건제도를 알면 중세사회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황제도와 봉건제도는 중세교회사의 시대구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로마를 중심축으로 하는 서방교회는 중세의 시작을 서로마제국의 멸망(476년)으로 설정하는 데에는 크게 이견이 없었으나, 중세의 끝을 설정하는데 있어서는 다양한 관점이 제시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1453년)되면서 이 지역의 많은 학자들은 중요한 문헌들과 그리스의 학문적 전통을 가지고 이탈리아로 이주하면서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이 촉발된 때를 중세의 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독일의 경우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였던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으로 중세의 서방교회가 균열되기 시작한 시기를 중세의 끝으로 보기도 하고, 프랑스의 경우 대혁명(1789년)으로 봉건제도가 무너진 때를 중세의 끝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하는데, 중세의 교회와 사회를 나누어서 생각해 본다면 중세의 교회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비공식적으로 나누어진 시기를 중세교회사의 시작으로 보고, 서방교회가 다시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누어진 시기를 중세의 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세교회사의 공간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로마를 하나의 중심축으로 하는 서유럽문명권과 콘스탄티노플을 또 다른 중심축으로 하는 비잔틴문명권으로 모두를 포괄해야하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두 개의 중심축으로 하는 중세교회사를 서술하려고 하면,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관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관계, 비잔틴 황제와 로마교황 간의 관계 등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관계를 만들어 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상황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2.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

 

  476년 게르만족의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폐위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습니다. 서로마 제국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게르만족의 이동’입니다. 로마제국 변경에서 부족의 형태로 거주하던 이민족들이 훈족의 침입으로 거주지를 잃고 로마 제국안으로 밀려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전쟁으로 군사력이 약화된 서로마 제국은 라벤나 전투에서 오도아케르에게 패하였고,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르투스가 폐위되면서 멸망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이 서방과 동방으로 처음 나누어진 것, 즉 ‘서로마 제국’의 기원은 286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Diocletianus, 재위: 286-305)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을 동서로 나누고, 2명의 정제(Augustus)와 2명의 부제(Caesar)를 두어 4구역으로 분할 통치하였습니다. 동방에서는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정제로서 시리아와 이집트 지역을 다스렸고, 부제인 갈레리우스는 발칸 반도를 다스렸습니다. 서방에서는 막시미아누스가 정제로서 스페인, 이탈리아, 북부 아프리카를 다스렸으며, 그의 부제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프랑스, 독일, 영국 지역을 통치했습니다. 이러한 체제를 둔 이유는 권력 승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부제인 카이사르가 정제인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잇고, 카이사르 자리가 공석이 되면 정제와 부제가 협의하여 새로운 카이사르를 지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제국 전체의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의 정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오늘날의 터키에 있는 니코메디아에 거주했고, 서로마 제국의 정제였던 막시미아누스는 밀라노에 있었기에 실질적인 로마 제국의 수도는 니코메디아였습니다. 로마제국 전체를 네 명이 나누어 통치하는 사두정치를 종식하고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였습니다. 그는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긴 후,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330년 이후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될 때까지 약 천 년간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로마 제국이 서로마와 동로마로 완전히 분리된 것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테오도시우스 황제(Theodosius, 재위: 379-395)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는 큰아들 아르카디우스를 동방의 황제로, 작은아들 호노리우스를 서방의 황제로 임명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 395년부터 402년까지 서로마 제국의 수도는 메디올라눔(밀라노)이었고, 402년부터 476년 멸망 때까지는 라벤나였습니다. 330년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된 이후, 도시 로마는 제국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라벤나가 함락되고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폐위당한 후, 권력의 공백이 생기면서 게르만족이 서로마 제국의 영토에 들어와 부족별로 독립적인 왕국으로 설립합니다. 로마 중심의 서양사 서술에서는 게르만족에 의해서 세워진 독립국가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야만왕국’(barbarian kingdom)’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왕국들은 헝가리 지역의 동고트 왕국,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 프랑스 지역인 프랑크 왕국, 북부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 이탈리아 반도의 랑고바르드 왕국, 독일지역인 알레마니아 왕국, 남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지역인 부르군트 왕국 등입니다. 이 가운데, 프랑크 왕국은 가장 강한 왕국으로 발전하면서 800년대에 이르러 옛 서로마 제국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3.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초대교회사에서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기록된 7개 교회(예루살렘, 안디옥, 고린도, 갈라디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와 요한계시록의 소아시아 7개 교회(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 사도가 생애의 마지막을 로마에서 보내고 순교한 이후, 로마 교회는 서방 교회의 중심으로 부상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그 영향력이 더욱 커졌습니다. 제국의 수도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로마 황실 및 유력 귀족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베드로와 바울이 마지막으로 사역하고 순교한 교회라는 역사적 의미를 내세워 다른 교회들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요한 교회 회의들은 동로마 황제의 주도로 동방지역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로마보다 콘스탄티노플이었습니다. 565년 교회회의에서 인정받은 주요 교구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등 다섯 곳이었는데, 이 중 서방 지역은 로마 교회 한 곳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를 비교해보면, 동방교회가 수적으로나 총대주교 수에서나 우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니케아 공의회(325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에베소 공의회(431년), 칼케돈 공의회(451년) 등 초대교회의 주요 공의회들이 모두 동방에서 개최되었다는 점은 당시 동방교회의 영향력을 잘 보여줍니다.

  서유럽만을 놓고 보면 로마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로마가 세계교회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451년 칼케돈 회의 때였는데, 이는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문제를 놓고 단성론과 양성론으로 분열되면서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주교 레오 1세는 단성론을 정죄했고, 그의 교서가 공식 채택되면서 단성론파는 이단으로 규정되어 동방교회가 분열되었습니다. 이후 동방교회는 레온 3세 황제의 성상파괴 명령을 두고 찬반으로 갈라졌고, 후대 황제들이 이 논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신학적 논의는 퇴색되고 제국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와 성상파괴 문제로 대립하게 됩니다.

  동방교회가 이러한 논쟁들로 분열되는 동안, 서방교회는 이런 갈등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 로마를 중심으로 단합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주교의 영향력 강화에는 당시의 사회·정치적 상황도 한몫했습니다. 452년 훈족이 로마를 침공했을 때, 레오 1세는 아틸라와의 외교적 협상으로 로마를 구했습니다. 455년 반달족의 침입 때도 가이세리크와 협상해 로마의 파괴와 시민 학살을 막아냈는데, 이는 황제도 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인들은 레오 1세 이후 로마 주교를 진정한 지도자로 인정하게 되었고, 서방의 실질적인 교황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무렵, 게르만인들은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로마 문화에 동화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안정을 유지했고, 교구가 행정조직을 대신했으며, 주교들은 행정관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야만 왕국'들이 서로마 지역에 들어섰을 때도, 로마 주교가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성령의 출처 문제, 즉 필리오케(filioque, and the son) 논쟁으로 1054년 대분열을 맞게 됩니다. 로마 교회는 교황 중심의 단일 지도체제(first above all)를, 동방교회는 다섯 총대주교의 동등한 권위를 인정하는 공의회 중심(first among equal)의 운영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교회 운영방식의 차이는 신학적 해석의 차이와 맞물려 교회의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4. 비잔틴 황제와 로마교황과의 관계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의 위상을 높였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신학적 논쟁을 조정했습니다. 이때부터 황제는 기독교의 보호자이자 교회의 행정적 문제를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교황과 협력하는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황제로 남았습니다.

  로마 교황은 점차 서유럽 내에서 독립적인 권위를 주장하게 되었고, 비잔틴 황제와의 관계도 서서히 멀어졌습니다. 726년 비잔틴 황제 레오 3세가 성상파괴령(Iconoclasm)을 발표하면서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 및 3세와 충돌했습니다. 결국 교황은 비잔틴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프랑크 왕국(서유럽 세력)과 가까워졌습니다. 800년,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씌우며 '서방 황제'로 선언했습니다. 이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당시 이레네 여제)를 공식적인 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며, 동서 기독교 세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이후 로마 교황은 프랑크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과 연합하며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고, 1054년에는 동서 교회의 대분열(Great Schism)이 발생했습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을 받아들여 제1차 십자군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십자군은 비잔틴과의 협력보다는 서유럽 세력의 확장을 목표로 삼았고, 결국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라틴 제국 건국)하면서 비잔틴과 교황청의 관계는 극단적으로 악화되었습니다. 교황 레오 9세의 사절단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가 서로 파문하면서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는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비잔틴 황제와 로마 교황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되었습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비잔틴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멸망 직전인 1439년, 비잔틴 황제 요한네스 8세는 피렌체 공의회에서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비잔틴 내부의 반발로 실패했습니다. 결국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교황의 군사적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오스만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비잔틴 황제와 로마 교황의 관계는 초기에는 협력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신학적 및 정치적 이유로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특히 8세기 이후 프랑크 왕국과의 연대, 1054년의 대분열, 1204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등은 양측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습니다. 결국 비잔틴 제국의 멸망 후에는 로마 교황이 서유럽 기독교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동방 정교회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