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사]3강: 중세 유럽의 세 문명(1)

관리자
2025-02-26


3강:  중세 유럽의 세 문명(1) 로마 중심의 서방 기독교 문명

 

 

1. 서론적 질문: 기독교 중심의 중세 서구 유럽 문명이 오늘의 문화에까지 남겨놓은 유산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명과 문화라는 중요한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명(文明, civilisation/civilization)은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 발전과 연관된 물질적 삶의 양태를 의미하며,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생활과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문명인은 야만인 또는 원시인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물질적으로 더 발전되고 세련된 삶의 양태를 누리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문화는 문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단순히 물질적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문화는 물질적 측면뿐 아니라 정신적 측면, 그리고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감정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사상, 의상, 언어, 종교, 법과 도덕 등의 규범, 그리고 특정 집단의 사고방식을 아우르는 사회 전반의 생활 양식이 바로 문화입니다. 예를 들어, '한'과 '정'은 한국인들의 문화에 뿌리를 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명과 문화의 차이는 중세 서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문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것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사고방식과 생활 양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문화는 종교와 예술, 언어와 문자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기독교 중심의 중세 유럽 문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문명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대학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대학이 생기기 이전에도 다양한 고등 교육 기관과 교육 제도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고등교육 기관을 대표하는 대학의 기원은 중세 유럽의 수도원 부속학교와 대성당 부속학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종교 교육을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신학, 법학, 의학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고등 교육기관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미국의 가장 오래된 대학인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이 목회자 양성 기관으로 시작한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둘째는 라틴어입니다. 라틴어는 본래 이탈리아 반도 중심부의 라티움 지역에서 사용되던 언어였습니다. 로마 공화정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의 주류 언어가 되었고, 로마 제국의 발전과 함께 서로마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최초의 라틴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가 라틴어로 신학 저술을 남겼고, 제롬(히에로니무스)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Vulgata) 성경"이 널리 보급되면서 라틴어는 서방 기독교의 공식 언어이자 학문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일상어로서의 라틴어는 사라졌지만, 학술 분야에서는 여전히 전문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2. 헬레니즘 문명을 대체한 서유럽의 기독교 문명

 

  476년 게르만족의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폐위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습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단순히 한 국가의 흥망성쇠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일반 역사에서는 고대와 중세를 구분하는 분기점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한 문명의 몰락인 동시에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하고, 새로운 세계 및 세계관이 형성된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476년 이전에는 그리스-로마 신화가 고대 세계의 우주관(cosmology)과 세계관을 형성하고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면, 그 이후에는 성서가 중세 세계의 우주관과 세계관의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대 문명의 대표적 유물이 신전이라면, 중세 문명의 대표적인 유물은 성당과 수도원입니다.서로마 제국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게르만족의 이동이라고 할 때, 게르만족이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킨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레니즘 문명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 변경에서 부족의 형태로 거주하던 야만인(Barbarian)이었습니다. 이들은 발트해 연안에 흩어져 살던 민족들로 수렵과 목축으로 살아가던 유목민들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변경에 흩어져 있던 게르만족의 거주지를 식민지로 만드는 대신, 아시아에서 시작하여 유럽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훈족과의 완충 역할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야만인들에게는 로마 제국보다 훈족이 더 무섭고 강한 존재였기에, 훈족을 피해서 로마 제국 안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중세 유럽을 형성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헬레니즘 문명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야만인들이었지만,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니케아파 신앙을 받아들인 정통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문명인들의 관점에서는 이들이 자신들의 문명과 문화를 동경하고 있었기에 문명을 파괴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보면, 니케아파 기독교인들이 헬레니즘 문명권 안으로 들어와서 그곳의 문명을 파괴하고 약탈하는 대신 이제막 로마 제국 안에서 뿌리를 내린 기독교 문화와 세계관을 보존하여 새 문명을 창조한 주역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게르만족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한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닙니다. 훈족을 피해 남하한 여러 민족들이 서유럽 각지로 흩어지거나 로마 제국 영토 안으로 들어와 로마를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명의 주인공이 된 민족이 있는가 하면 옛 문명을 파괴하면서 이동하다가 동로마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한 반달족과 같은 악당도 있습니다. 게르만족의 새로운 문명 건설과 관련하여 2개의 단어를 기억할 필요가 있는데, 하나는 고딕(Gothic)입니다. 중세 유럽 기독교 건축의 대표적인 양식을 고딕 양식이라고 하는데 하늘을 향하는 높은 첨탑을 특징으로 하는 이 양식은 게르만족의 한 일파인 고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반달리즘(vandalism)으로 문명 파괴나 약탈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반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3. 유럽의 개념


  중세교회사를 유럽교회사라고 할 때 유럽은 지리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지리적 개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문화적 개념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중세 가톨릭교회가 유럽이라는 개념을 기독교 문화가 형성된 지역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중심의 중세교회사에서 말하는 기독교 문화에 동방 기독교, 즉 비잔틴 문명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6세기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로마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지역으로 유럽을 정의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개념은 중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유럽연합 회원국 가입 조건과 같이 정치적인 문제로도 작용합니다. 1993년 6월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열린 유럽 이사회에서 결정된 코펜하겐 기준은 유럽 연합 가입에 대한 적합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이 기준에는 민주주의, 법의 지배, 인권 소수집단의 존중과 권리보호를 통해 안정된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어 유럽의 개념이 지리적인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는 유럽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중세 유럽의 중요한 사건은 8세기 초반에 생겨납니다. 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카롤루스 마르텔루스가 732년에 이슬람 군대를 상대로 프랑스의 투르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당시 이슬람 군대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 전투에서 패한 결과, 이슬람 군대는 알프스와 피레네 산맥에서 저지당하였고, 카롤루스는 자신의 군대를 유럽 공동체 군대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실제로 이 전투의 지휘관은 카롤루스 마르텔뿐만 아니라 아키텐의 공작 오도였으며 휘하의 군대는 프랑크 왕국뿐만 아니라 부르군트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 아키텐, 슈바벤 공국의 군대도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 참여한 군대에 유럽 공동체 군대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이슬람 세력에 저항한다는 의미가 유럽이라는 개념 속에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이후 이슬람 세력이 지속적으로 팽창하자, 처음에는 제외되었던 동방 기독교도 유럽의 개념에 편입되는 듯하였으나, 이슬람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동방 기독교 및 비잔틴 문명은 유럽의 개념에서 제외됩니다.

 

4. 봉건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로마 문명, 게르만 전통이 합쳐진 중세 유럽 사회를 지탱한 두 기둥은 기독교와 봉건제입니다. '봉건제'는 게르만 민족의 전통인 종사제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게르만 종사들은 주군과 계약을 맺어 군사적인 의무를 이행하고, 주군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분배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도 군주가 가신에게 경작할 땅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군사적 의무를 부과하는 은대지제도가 있었는데, 이 두 제도가 결합하여 유럽의 봉건제가 만들어졌습니다.

  조르주 뒤비에 의하면, 중세 사회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세 위계는 기도하는 사제, 전투하는 기사, 일하는 농노입니다. 중세는 이 세 위계를 기본으로 하여 위계적 질서로 작동된 사회입니다. 영주와 기사, 농노 계급이 군역 및 토지 전대와 계약을 체결합니다. 한 당사자가 계약 조건을 위반할 때는 해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호적 또는 쌍무적 계약입니다. 영주가 소유하는 영지를 장원이라고 했는데, 장원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촌락을 기반으로 한 자급자족적 경제단위를 말합니다. 영주가 소유하는 장원을 통한 자급자족적 농업 중심의 경제는 이 봉건제를 작동시키는 기본 경제 체제입니다. 장원을 소유한 영주들은 상위 영주에게 각각 같은 방식의 계약을 체결하여 사회가 돌아가는 피라미드 구조를 형성하게 됩니다. 중세의 국왕이나 제후들이 이 봉건 사회의 피라미드 구조에서 상위에 위치했습니다.

  주군과 신하 사이의 봉건적 쌍무계약을 기반으로 하는 봉건제 작동 방식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는 잉글랜드의 존 왕과 귀족 대표 사이에 체결한 '대헌장'(Magna Carta)입니다. 존 왕은 왕위에 오를 때 유럽 대륙 전체에 걸쳐서 넓은 영토를 상속받았습니다. 그러나 실지왕, 곧 땅을 잃은 왕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모든 영토 분쟁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영토 회복에 대한 집착은 무리한 군역과 세금을 필요로 하였고, 또 집행하는 과정에서 귀족 세력과 성직자들의 반발을 사고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존 왕과 귀족 대표들 사이에 체결된 것이 대헌장입니다.

  봉건제도와 장원제도는 피라미드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봉건 위계에서 국왕은 가장 상위에 있지만, 병사 동원이 가능한 귀족이나 기사 계급에 의해서 언제든 권력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견고해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연결고리가 약하였기에 그 약한 부분을 쌍무적인 계약이나 정략 결혼을 통한 동맹관계 형성으로 강화했습니다. 각각의 주군과 봉신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장원들과 그 장원의 영주들을 지배하는 상위 군주들과의 쌍무계약이 중세 유럽의 사회를 받치고 있었던 기본 구조입니다.


5. 중세 유럽을 형성한 기독교

 

  중세 유럽을 형성한 기독교민족과 국가로 나뉘어 있는 중세인들을 하나로 묶어 준 최상의 가치는 종교였습니다. 중세인들의 정체성은 개별 국가의 국민이라는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세계(Christendom)의 충실한 일원이라는 고백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교황의 요청에 따라 전 유럽이 십자군 원정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인, 잉글랜드인, 독일인, 스코틀랜드인 등과 같이 민족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정체성은 후기 중세기에 형성된 개념입니다. 이러한 민족적 정체성은 언어와 문자로 표현되는데,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로 문서가 작성된 것은 14세기부터 이루어진 일입니다.중세가 형성될 때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의 역할을 넘어서서 사회 전반을 이어 주고 작동시키는 기초 역할을 했습니다.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로마 제국의 행정이 마비되었을 때 기독교의 교구체제는 행정구역을 대신하였고, 주교가 지방장관의 역할을 겸하기도 했습니다. 유럽에서 교회는 공적 행정 조직이었습니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한 인간의 일생을 교회 교적부로 관리했습니다. 유아세례 증명서가 오늘날의 출생증명서를 대신하였고, 호적 관리를 국가가 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혁명 이후의 일입니다.중세 유럽이 교황이 지배했던 시대였다는 것은 유럽의 군주, 제후 세력들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통해서 교황이 피라미드 구조의 최상위에 위치하여 군주로서 권한을 행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교황들 가운데는 프랑스 국왕이나 훗날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와 힘겨루기를 하면서 자신의 권한이 황제 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이들도 있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교황권이 약화되고 세속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