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중세 유럽의 세 문명(2):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비잔틴 문명
1. 서론적 질문: 로마와 로마 가톨릭 중심의 교회사 해석이 과연 타당할까?
서양 중세사에 등장하는 3대 문명권은 서유럽 문명, 이슬람 문명, 비잔틴 문명입니다. 서유럽 문명은 도시 로마와 서방의 로마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명이고, 동유럽의 비잔틴 문명는 콘스탄티노플과 동방 정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명이며, 이슬람 문화는 스페인의 그라나다와 세비야를 중심으로 하여 이베리아 반도와 북부 아프리카에서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권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서양의 중세사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라는 두 종교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서양 중세”하면, 로마 가톨릭 중심의 서유럽 문화만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서유럽 중심의 서양사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역사 해석을 하게된 원인부터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서양 고대문명사의 끝이자 서양 중세사 및 중세교회사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은 서유럽 중심의 역사 해석으로, 동유럽 및 동방 정교회는 제외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로마 중심, 서유럽 중심의 역사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로마 가톨릭 중심의 교회사 해석으로 연결됩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서유럽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했던 로마 가톨릭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사의 해석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활동무대를 펼쳤던 동방정교회를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고려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게 만듭니다.
2.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수도 천도와 그 의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공인과 비잔티움으로의 수도 천도는 서양 문명사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에 로마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겼습니다. 비잔티움은 본래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곧 도시국가들 가운데 그리스 남부 있었던 오래된 도시로, 메가라 사람들이 건설한 식민도시였습니다. 이 메가라 사람들은 기원전 687년에는 칼케돈을 그리고 기원전 667년에는 비잔티움을 건설했습니다. 비잔티움이라는 도시 이름은 메가라의 왕자 뷔자스(Byzas)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긴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향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 주로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내용들입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사사건건 황제의 권력에 간섭하는 원로원을 효과적으로 무시하는 방법으로 제국의 수도를 옮기는 것이 효과적이었다는 설명입니다. 로마의 원로원은 오랜 전통을 가진 정치 기구로 오늘날 국회에 해당되는데, 마치 대한민국의 행정 수도를 세종시로 옮기면서 청와대를 같이 옮기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군사적으로 보면, 도시 로마는 서로마 제국의 영토에 해당되는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와는 가깝지만 동로마 제국의 영토에 해당되는 발칸반도와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에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가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이미 스페인과 영국까지 로마의 영토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바다로 막혀있는 서쪽보다는 아시아와 연결되어 있는 동쪽의 방어를 강화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습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으나, 이 시기에 동고트족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까지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비잔티움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교회사의 관점에서 보면,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심 때문에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밀비아 다리에서의 승리 이후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 체험하였고, 교회를 후원하는 정책을 펴는 등 어떤 방식으로든 교회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가장 이른 시기에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소아시아 지역에서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벌였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 당시 오랜 전통을 가진 교회들은 소아시아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로마에 교회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도시 전체의 분위기는 전통적으로 이교도 문화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신앙심이 깊어져 가면서 이교도 문화가 만연되어 있는 로마를 떠나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는 해석입니다.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이후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유럽의 주도권은 로마가 아닌 콘스탄티노플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예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대성당을 비교해 보면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동방교회를 대표하는 하기아 소피아(또는 소피아 대성당)은 537년에 완공되었고,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성 베드로 성당은 162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서방보다 동방지역이 문화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아울러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에 머물고 있었기에, 황실의 채플린은 당연히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습니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모든 군종장교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직급에 있는 군종감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의 직책이기도 했습니다.
제국의 수도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이후에도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에 대해서 우위권을 계속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신학적으로 타당성이 부족합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다음가는 교회로 인정하였습니다. 이후에도 로마 교회는 교황의 권위가 유지되었음을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교회의 중심이 점점 동방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중요한 신학적 논쟁(예: 삼위일체 논쟁, 기독론 논쟁 등)은 대부분 동방 지역(알렉산드리아, 안디옥)에서 발생하였으며, 로마는 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는 로마 교회의 수위권 주장이 실질적인 근거보다는 서방 중심의 역사 해석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합니다.
3. 비잔틴 문명의 유산과 영향
비잔틴 문명은 단순히 동로마 제국의 역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이후에도, 비잔틴의 정치, 종교, 법률, 예술, 학문적 전통은 여러 방면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특히 정교회의 확산, 법률과 행정 체계, 예술과 건축, 그리고 학문과 문화의 전승을 통해 유럽과 동유럽, 그리고 이슬람 세계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비잔틴 문명의 유산은 현대까지도 그 영향이 뚜렷이 남아있을 만큼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전승되었습니다.
첫째, 비잔틴 제국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정교회의 발전과 확산입니다. 4세기 이후 비잔틴 제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교회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1054년 동서 교회의 대분열(Great Schism) 이후, 비잔틴 제국은 로마 가톨릭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신앙 전통을 확립했으며, 이로써 동방 정교회(Orthodox Christianity)가 형성되었습니다. 정교회는 그리스, 발칸반도, 러시아 등에서 강력한 종교적 기반을 구축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후, 러시아가 비잔틴 정교회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러시아는 스스로를 ‘제3의 로마’라고 칭하며 비잔틴 제국의 정신적 후계자임을 자처했습니다.
둘째, 비잔틴 제국은 법률과 행정 시스템에서도 중요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Corpus Juris Civilis)’을 편찬하여 로마법을 체계화했고, 이 법전은 이후 서유럽과 동유럽의 법 체계에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 법전은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éon)과 독일 민법 등 유럽 법률 체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근대 법률 발전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비잔틴 제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구축하여 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했습니다. 황제는 절대적 권력을 바탕으로 제국 전역을 관리할 수 있는 행정 관료 시스템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행정 체계는 이후 오스만 제국, 러시아,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의 통치 체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셋째, 비잔틴 문명은 독창적인 예술과 건축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후대 여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잔틴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돔과 모자이크입니다. 대표적인 예시인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또는 아야 소피아)는 정교회 성당뿐만 아니라 이슬람 모스크 건축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돔을 활용한 건축 기법은 이슬람 건축으로 계승되어 이스탄불의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1세의 모스크)와 같은 건축물로 발전했습니다.
미술 분야에서도 비잔틴 문명은 깊은 영향을 남겼습니다. 비잔틴의 성화(icon)와 모자이크 예술은 정교회 예배의 필수 요소가 되었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는 비잔틴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성 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에서는 비잔틴 모자이크 기법을 활용한 장식이 이루어졌습니다.
넷째, 비잔틴 제국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 역사, 과학, 문학을 보존하고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학문적 전통은 유럽 르네상스의 기초가 되었다. 비잔틴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포클레스, 헤로도토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과 역사 기록을 체계적으로 보존했으며, 이 지식이 서유럽으로 전해지면서 르네상스 시대 학문의 부흥을 이끌었다습니다. 특히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후 많은 비잔틴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망명했고, 이들은 서유럽 학자들에게 그리스 철학과 문학을 전수하며 르네상스 인문주의(Humanism)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또한, 비잔틴의 교육 전통은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의 학문 발전에도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이 사용하는 키릴 문자는 동방교회 선교사인 키릴로스와 메소디오스 형제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 동방교회의 신학
유대-로마 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주후 70년 이후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 세계로 옮겨졌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 이르러 라틴 서방교회가 신학적인 흐름에서 주도권을 잡았지만, 그때까지도 동방교회에는 그 영향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주후 5세기 서방세계의 몰락을 가져온 게르만족의 침입은 서방교회를 후퇴시킨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동방교회 및 동로마제국의 황제와 관계를 단절하고 독자적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명분을 얻게되었습니다.
서방교회는 중세시대를 초대교회와 초대교회가 다시 회복되기까지의 중간기간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동방교회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동방교회는 교부들의 시대가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라 비잔티움(Byzantium, 구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비잔틴 그리스도교 제국(Byzantine Christian Empire)에 의하여 계승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동로마제국과 동방교회는 모두 황제의 지배 아래 있었고, 황제는 교회회의를 소집하고 교회회의의 최종적인 결정사항을 인준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들 가운데 가장 위대했던 인물은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로 527년부터 565년까지 재위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통치는 비잔틴 제국의 정점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제국은 그 다음 세기에 일어난 이슬람교도들의 침략으로 쇠퇴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7세기 중엽, 무함마드(Muhammad)가 632년에 죽고, 그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슬람 군대는 현재 튀르키예 남쪽과 동쪽에 위치했던 비잔틴 제국을 완전히 정복하였습니다. 이후의 공세는 완만하였으나 결국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Istanbul)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복이 곧 그 땅에 있던 모든 교회들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이슬람의 지배자들은 이류 시민으로 다루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심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인내는 그리스도들에게 암묵적인 협조를 요구하는 것이었지, 이슬람교로 개종할 것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의 콥틱교회(Coptic Church)는 오늘날까지 전체 인구의 십 퍼 센트가 넘고 있으며, 이집트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주후 십 세기 러시아가 정교회(Orthodox Christianity)에 합류함으로서 동방교회는 잃어버렸던 교세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였습니다. 동방교회는 칼케돈 공의회 이후 몇 세기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논쟁에서 주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잔틴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다마스커스의 요한입니다. 요한 만사워(John Mansour)는 약 650년경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시리아는 이슬람의 통치 하에 있었고, 요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칼리프를 위해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후에 자기 직업을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고, 75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한은 마지막 동방교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성과는 초대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체계적인 입문서를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지식의 원천』(Fount of Knowledge)에 앞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일벌처럼 나는 진리를 따르는 모든 것들을 취합해야 합니다. 그것이 설사 우리의 적들에게 서 나온 것이라도 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나의 결론을 요구하지 않습니 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신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도달한 이 성과들을 나는 그저 취합하고 정리하여 가능한 한에서 하나의 논문으로 담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논증”(Dialectic) 서문
4강: 중세 유럽의 세 문명(2):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비잔틴 문명
1. 서론적 질문: 로마와 로마 가톨릭 중심의 교회사 해석이 과연 타당할까?
서양 중세사에 등장하는 3대 문명권은 서유럽 문명, 이슬람 문명, 비잔틴 문명입니다. 서유럽 문명은 도시 로마와 서방의 로마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명이고, 동유럽의 비잔틴 문명는 콘스탄티노플과 동방 정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명이며, 이슬람 문화는 스페인의 그라나다와 세비야를 중심으로 하여 이베리아 반도와 북부 아프리카에서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권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서양의 중세사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라는 두 종교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서양 중세”하면, 로마 가톨릭 중심의 서유럽 문화만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서유럽 중심의 서양사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역사 해석을 하게된 원인부터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서양 고대문명사의 끝이자 서양 중세사 및 중세교회사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은 서유럽 중심의 역사 해석으로, 동유럽 및 동방 정교회는 제외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로마 중심, 서유럽 중심의 역사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로마 가톨릭 중심의 교회사 해석으로 연결됩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서유럽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했던 로마 가톨릭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사의 해석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활동무대를 펼쳤던 동방정교회를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고려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게 만듭니다.
2.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수도 천도와 그 의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공인과 비잔티움으로의 수도 천도는 서양 문명사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에 로마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겼습니다. 비잔티움은 본래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곧 도시국가들 가운데 그리스 남부 있었던 오래된 도시로, 메가라 사람들이 건설한 식민도시였습니다. 이 메가라 사람들은 기원전 687년에는 칼케돈을 그리고 기원전 667년에는 비잔티움을 건설했습니다. 비잔티움이라는 도시 이름은 메가라의 왕자 뷔자스(Byzas)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긴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향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 주로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내용들입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사사건건 황제의 권력에 간섭하는 원로원을 효과적으로 무시하는 방법으로 제국의 수도를 옮기는 것이 효과적이었다는 설명입니다. 로마의 원로원은 오랜 전통을 가진 정치 기구로 오늘날 국회에 해당되는데, 마치 대한민국의 행정 수도를 세종시로 옮기면서 청와대를 같이 옮기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군사적으로 보면, 도시 로마는 서로마 제국의 영토에 해당되는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와는 가깝지만 동로마 제국의 영토에 해당되는 발칸반도와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에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가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이미 스페인과 영국까지 로마의 영토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바다로 막혀있는 서쪽보다는 아시아와 연결되어 있는 동쪽의 방어를 강화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습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으나, 이 시기에 동고트족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까지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비잔티움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교회사의 관점에서 보면,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심 때문에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밀비아 다리에서의 승리 이후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 체험하였고, 교회를 후원하는 정책을 펴는 등 어떤 방식으로든 교회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가장 이른 시기에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소아시아 지역에서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벌였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 당시 오랜 전통을 가진 교회들은 소아시아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로마에 교회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도시 전체의 분위기는 전통적으로 이교도 문화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신앙심이 깊어져 가면서 이교도 문화가 만연되어 있는 로마를 떠나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는 해석입니다.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이후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유럽의 주도권은 로마가 아닌 콘스탄티노플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예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대성당을 비교해 보면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동방교회를 대표하는 하기아 소피아(또는 소피아 대성당)은 537년에 완공되었고,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성 베드로 성당은 162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서방보다 동방지역이 문화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아울러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에 머물고 있었기에, 황실의 채플린은 당연히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습니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모든 군종장교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직급에 있는 군종감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의 직책이기도 했습니다.
제국의 수도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이후에도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에 대해서 우위권을 계속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신학적으로 타당성이 부족합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다음가는 교회로 인정하였습니다. 이후에도 로마 교회는 교황의 권위가 유지되었음을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교회의 중심이 점점 동방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중요한 신학적 논쟁(예: 삼위일체 논쟁, 기독론 논쟁 등)은 대부분 동방 지역(알렉산드리아, 안디옥)에서 발생하였으며, 로마는 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는 로마 교회의 수위권 주장이 실질적인 근거보다는 서방 중심의 역사 해석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합니다.
3. 비잔틴 문명의 유산과 영향
비잔틴 문명은 단순히 동로마 제국의 역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이후에도, 비잔틴의 정치, 종교, 법률, 예술, 학문적 전통은 여러 방면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특히 정교회의 확산, 법률과 행정 체계, 예술과 건축, 그리고 학문과 문화의 전승을 통해 유럽과 동유럽, 그리고 이슬람 세계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비잔틴 문명의 유산은 현대까지도 그 영향이 뚜렷이 남아있을 만큼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전승되었습니다.
첫째, 비잔틴 제국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정교회의 발전과 확산입니다. 4세기 이후 비잔틴 제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교회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1054년 동서 교회의 대분열(Great Schism) 이후, 비잔틴 제국은 로마 가톨릭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신앙 전통을 확립했으며, 이로써 동방 정교회(Orthodox Christianity)가 형성되었습니다. 정교회는 그리스, 발칸반도, 러시아 등에서 강력한 종교적 기반을 구축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후, 러시아가 비잔틴 정교회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러시아는 스스로를 ‘제3의 로마’라고 칭하며 비잔틴 제국의 정신적 후계자임을 자처했습니다.
둘째, 비잔틴 제국은 법률과 행정 시스템에서도 중요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Corpus Juris Civilis)’을 편찬하여 로마법을 체계화했고, 이 법전은 이후 서유럽과 동유럽의 법 체계에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 법전은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éon)과 독일 민법 등 유럽 법률 체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근대 법률 발전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비잔틴 제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구축하여 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했습니다. 황제는 절대적 권력을 바탕으로 제국 전역을 관리할 수 있는 행정 관료 시스템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행정 체계는 이후 오스만 제국, 러시아,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의 통치 체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셋째, 비잔틴 문명은 독창적인 예술과 건축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후대 여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잔틴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돔과 모자이크입니다. 대표적인 예시인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또는 아야 소피아)는 정교회 성당뿐만 아니라 이슬람 모스크 건축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돔을 활용한 건축 기법은 이슬람 건축으로 계승되어 이스탄불의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1세의 모스크)와 같은 건축물로 발전했습니다.
미술 분야에서도 비잔틴 문명은 깊은 영향을 남겼습니다. 비잔틴의 성화(icon)와 모자이크 예술은 정교회 예배의 필수 요소가 되었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는 비잔틴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성 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에서는 비잔틴 모자이크 기법을 활용한 장식이 이루어졌습니다.
넷째, 비잔틴 제국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 역사, 과학, 문학을 보존하고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학문적 전통은 유럽 르네상스의 기초가 되었다. 비잔틴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포클레스, 헤로도토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과 역사 기록을 체계적으로 보존했으며, 이 지식이 서유럽으로 전해지면서 르네상스 시대 학문의 부흥을 이끌었다습니다. 특히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후 많은 비잔틴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망명했고, 이들은 서유럽 학자들에게 그리스 철학과 문학을 전수하며 르네상스 인문주의(Humanism)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또한, 비잔틴의 교육 전통은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의 학문 발전에도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이 사용하는 키릴 문자는 동방교회 선교사인 키릴로스와 메소디오스 형제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 동방교회의 신학
유대-로마 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주후 70년 이후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 세계로 옮겨졌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 이르러 라틴 서방교회가 신학적인 흐름에서 주도권을 잡았지만, 그때까지도 동방교회에는 그 영향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주후 5세기 서방세계의 몰락을 가져온 게르만족의 침입은 서방교회를 후퇴시킨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동방교회 및 동로마제국의 황제와 관계를 단절하고 독자적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명분을 얻게되었습니다.
서방교회는 중세시대를 초대교회와 초대교회가 다시 회복되기까지의 중간기간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동방교회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동방교회는 교부들의 시대가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라 비잔티움(Byzantium, 구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비잔틴 그리스도교 제국(Byzantine Christian Empire)에 의하여 계승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동로마제국과 동방교회는 모두 황제의 지배 아래 있었고, 황제는 교회회의를 소집하고 교회회의의 최종적인 결정사항을 인준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들 가운데 가장 위대했던 인물은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로 527년부터 565년까지 재위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통치는 비잔틴 제국의 정점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제국은 그 다음 세기에 일어난 이슬람교도들의 침략으로 쇠퇴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7세기 중엽, 무함마드(Muhammad)가 632년에 죽고, 그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슬람 군대는 현재 튀르키예 남쪽과 동쪽에 위치했던 비잔틴 제국을 완전히 정복하였습니다. 이후의 공세는 완만하였으나 결국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Istanbul)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복이 곧 그 땅에 있던 모든 교회들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이슬람의 지배자들은 이류 시민으로 다루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심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인내는 그리스도들에게 암묵적인 협조를 요구하는 것이었지, 이슬람교로 개종할 것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의 콥틱교회(Coptic Church)는 오늘날까지 전체 인구의 십 퍼 센트가 넘고 있으며, 이집트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주후 십 세기 러시아가 정교회(Orthodox Christianity)에 합류함으로서 동방교회는 잃어버렸던 교세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였습니다. 동방교회는 칼케돈 공의회 이후 몇 세기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논쟁에서 주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잔틴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다마스커스의 요한입니다. 요한 만사워(John Mansour)는 약 650년경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시리아는 이슬람의 통치 하에 있었고, 요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칼리프를 위해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후에 자기 직업을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고, 75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한은 마지막 동방교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성과는 초대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체계적인 입문서를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지식의 원천』(Fount of Knowledge)에 앞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일벌처럼 나는 진리를 따르는 모든 것들을 취합해야 합니다. 그것이 설사 우리의 적들에게 서 나온 것이라도 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나의 결론을 요구하지 않습니 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신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도달한 이 성과들을 나는 그저 취합하고 정리하여 가능한 한에서 하나의 논문으로 담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논증”(Dialectic)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