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사]6강: 교황제도의 시작과 발전

관리자
2025-03-27

6강: 교황제도의 시작과 발전

 

1. 서론적 질문: 교황제도란 무엇인가?

 

 로마 가톨릭 교회는 로마의 주교(bishop of Rome)에게 교황(Pope, Papa)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 바티칸 시국의 통치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교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교황은 그리스도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맡기신 사명을 계승하는 자로, 온 교회의 가시적 일치의 표징이다.” 교황제도란 이 교황이라는 직책을 가진 교회 지도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의 제도적 권력구조 및 교회통치 체계 전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로마의 주교를 전 세계 가톨릭 교회의 최고 수장인 교황으로 인정하는 감독제 교회정치 형태라고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교회정치 형태는 크게 감독제, 장로제, 회중제로 나뉘는데, 이를 국가 정치 형태에 비유하면 감독제는 왕정, 장로제는 대표 민주주의 또는 의회정치, 회중제는 직접 민주주의와 유사합니다. 학자들은 교황제를 별도의 정치 형태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는 교황제도가 감독제에서 출발했으나 발전 과정에서 독특한 구조와 특징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황제도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교인 교황이 모든 권위의 상징이자 원천이 된다는 성직자의 교권제도에 기초합니다. 가톨릭은 피라미드 구조의 단일명령 계통을 가진 중앙집권적 조직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마태복음 16장 18절을 근거로 교황이 교회의 중심이자 머리라고 주장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가톨릭교회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지상의 특별한 대리자이자 교회의 머리로 임명했다고 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대리자이며, 따라서 베드로를 계승한 로마의 역대 감독인 교황이 참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를 위임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교회의 수장권은 교황을 통해 사도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인이자 베드로의 합법적 계승자로서 교리 해석, 성사 집행, 사목 지도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며, 주교 선출과 임명을 비롯한 교회의 중요 결정권을 가집니다.

  교황 비오 9세는 1869-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성에 관한 의제를 채택하고, 이를 교회 헌장에서 다루도록 했습니다. 1870년 7월 18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의 표결을 통해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 교리를 담은 교회 헌장 <영원한 목자>가 승인되었습니다. 교황의 무류성이란 교황이 교도권 소유자로서 전체 교회를 위해 신앙이나 도덕에 관한 최종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은 오류가 없다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2. 교황제도의 기원 (1-3세기)

 

1) 역사적 배경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 가르치시고 전도하시고 치유하시는 사역 과정에서 따로 불러 세우신 12명의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이 늘어나자, 유대교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을 신성모독 또는 이단적 가르침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박해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회심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열심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한편, 로마제국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무신론자로 몰아가기도 했고, 국가의 종교정책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해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박해받는 종교로 존재하던 1세기부터 3세기까지, 교회는 공식적인 제도나 권위를 갖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의 시기에도 로마에 있는 교회는 점차 상징적인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특히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사역하다가 순교했다는 전승은, 로마 교회에 사도적 권위를 부여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했으며, 로마 교회는 그를 자신들의 초대 주교이자 권위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 머물며 사역했고, 네로 황제의 박해 아래 순교했다는 전승은 2세기 후반부터 문헌에 나타나는데, 이는 후일 로마 주교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용했습니다. 이 전승은 베드로가 로마 교회의 초대 주교였다는 주장으로 연결되며, 이후 로마 주교의 권위가 “베드로의 후계자”로 정당화되는 논리로 발전하게 됩니다. 리용의 주교였던 이레내우스는 『이단 반박』 3.3.2에서 로마 교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가장 위대한 두 사도 베드로와 바울에 의하여 로마에서 창설되고 조직되었으며 모든 이들에게 알려진 지극히 오래되고 가장 큰 교회만을 살펴봄으로써... 모든 교회는 이 로마 교회가 지니는 특수한 권위로 인하여 마땅히 로마 교회와 일치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교회는 전세계에 있는 신자들을 말하며 로마 교회는 그들을 통하여 항상 자신 안에 사도들의 전승을 보존해 왔던 것이다. ... 고린도교회 신자들 사이에 심각한 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로마 교회는 그들을 화해시키고, 그들의 신앙을 북돋아주며 그들에게 얼마 전에 사도로부터 받은 전승을 전해주기 위해서 아주 중대한 편지를 써 보냈다.

  “로마 교회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세우고, 모든 교회가 그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모두 로마에서 사역하다가 순교했다는 사실로부터 복잡한 문제가 생겨납니다.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것처럼 교회 안에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분쟁이 있었습니다. 로마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분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시기까지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하는 전승과 바울을 1대 교황으로 하는 전승이 경쟁하고 있었던 자료가 존재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초기 로마 주교의 역할: 주교단의 일원으로서의 협력적 리더십

  초기 기독교, 특히 1-2세기의 교회에서는 주교(에피스코포스, bishop)가 각 지역 교회를 이끄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주교는 오늘날로 보면 위임 목사, 행정가, 교사, 목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교회가 아직 조직적으로 성장하기 전이었기에,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와 한 명의 주교가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장로들과 집사들이 함께 교회를 섬겼습니다. 주교는 예배 인도, 세례와 성만찬 집례, 말씀 교육, 교리의 정통성 수호를 담당했습니다. 이런 주교단의 일원으로서 로마 주교는 처음부터 특별한 위치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로마 교회의 주교도 다른 도시 주교들처럼 한 지역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 주교는 점차 다른 교회들보다 더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교회는 중앙집권적 조직이 없었고 각 지역 교회가 자율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다만 중요한 신학적 문제나 분열이 생기면, 주교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거나 공의회를 통해 해결했습니다. 이러한 공의회에서 로마 주교는 한 사람의 조언자이자 동료로서 의견을 나누었고, 자신을 다른 이들 위에 두지 않고 '형제들 중 한 사람'으로서 협력적 리더십을 보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1세기 말 고린도 교회에 심각한 분열이 있었을 때 로마의 주교 클레멘트 1세(Clement I)가 보낸 편지를 들 수 있습니다. 96년경에 작성된 이 편지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돕기 위한 사랑의 조언"이라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여러분을 사랑으로 권면하며, 평화와 질서를 되찾으시기를 기도합니다"(클레멘트 제1서, 제59장). "클레멘트 제1서"를 보면, 로마 주교가 다른 교회를 통제하려는 권력자가 아닌 함께 고민하는 조언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문서가 로마 교회의 중재자적 역할과 도덕적 권위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이라고 해석합니다.

  당시 로마 주교는 '모든 교회 위의 권위'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다른 교회들이 로마 교회를 점차 존경하고 주목하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로마가 제국의 수도이자 정치·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이곳에서 순교했다는 전승으로 인해 사도적 전통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로마 교회가 신앙과 생활에서 정통성을 지키는 교회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로마 주교의 말은 신뢰할 만하며, 로마 교회가 다른 교회에 권면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확산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시기(1-2세기)의 주교들은 지역 공동체의 대표자이자 목자로서 역할했고, 로마 주교 역시 이 틀 안에서 다른 교회들과 상호협력적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 시기 교회 리더십은 사도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상호 견제와 협력을 중시했지만, 로마 교회는 도시의 영향력과 사도 전승의 배경으로 인해 일찍부터 그 권위가 인정되기 시작했습니다.

 

3. 교황권의 신학적 정당화 (4-5세기)

 

  교황제도는 단순한 행정 구조나 교회 정치제도를 넘어, 신학적 권위와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 복합적 제도로 발전했습니다. 그 중요한 전환점이 바로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중반 사이의 시기이며,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대교황 레오 1세(Leo I, 재위 440-461)입니다. 레오 1세는 교황권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한 최초의 인물로, 단순한 종교지도자가 아닌 교리의 수호자, 교회 제도의 수립자도 기억됩니다.

 

1) 역사적 배경: 기독교 공인 이후의 변화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발표한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내용으로, 교회사에서는 중대한 전환점을 가져온 사건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이전처럼 박해를 피해서 지하에서 숨어 지내는 공동체가 아니라, 국가의 후원을 받아서 공적으로 조직되고 제도화되는 종교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 교회의 주교는 단지 목회자이자 교사일 뿐 아니라, 행정적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강화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로마 교회는 제국의 수도라는 지리적 위치, 그리고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순교지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2) 대교황 레오 1세의 등장

  이러한 변화의 시점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레오 1세입니다. 그는 삼위일체 논쟁을 둘러싼 교회의 신학적 혼란,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와 행정적 혼란에 직면하면서, 교황의 권위를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신학적 기반 위에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레오는 자신이 로마 교회의 주교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교회를 대표하는 보편적 리더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교황직이 단순히 교회 행정직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대표하는 사도적 사명의 연속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표현은 "베드로가 지금도 우리 안에서 말하고 있다"입니다. 즉, 교황은 단지 베드로의 후계자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베드로의 사명을 대행하는 존재(Vicarius Petri)라는 것입니다.

 

3) 칼케돈 공의회와 '교황 레오의 서'

  레오 1세의 신학적 리더십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둘러싼 이단 논쟁으로 인해 극심한 분열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레오는 공의회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플라비아노에게 보낸 서신인 '레오의 서(Tome of Leo)'를 제출했습니다. 이 문서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하나의 인격 안에 공존한다는 교리를 명확하게 천명하였습니다. 공의회에 참석한 동방 주교들은 이 서신을 읽고 "베드로가 레오를 통해 말하였다!" (Peter has spoken through Leo!)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로마 교황이 교리 해석의 최종 권위자로 인식되기 시작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4) 정치적 리더십: 아틸라와의 만남

  레오 1세는 신학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정치적 인물이었습니다. 452년, 훈족의 왕 아틸라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로마를 위협했을 때, 레오는 직접 아틸라와 담판을 벌였습니다. 당시 서로마 황제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고, 군대도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이 직접 나서서 도시를 지키는 협상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교황이 단지 종교적 인물을 넘어 정치적 중재자이자 이탈리아의 보호자로 인식되기 시작한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이는 중세 유럽 사회에서 교황의 위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