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샤를마뉴 제국의 성립과 기독교 세계의 분열
1. 서론적 질문: 하나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왜 두 개의 교회 –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 로 나뉘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중세 유럽 역사와 중세 교회사를 공부할 때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문제입니다. 초대 교회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공동체(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하나됨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단들의 가르침으로 교회 내부에 균열이 생겼고, 교회와 정치권력과의 밀접한 관계는 믿음의 순수성을 위협했습니다. 교회는 이제 단순한 신앙 공동체를 넘어 세속 권력과 결합한 조직이 되어갔고, 그 안에서 정통성과 권위,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깊어져 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주제는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샤를마뉴의 등장과 그가 세운 제국, 그리고 그 제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세 서유럽의 새로운 질서는 겉으로는 강력하고 통일된 기독교 세계를 만들어낸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특히 동방교회와의 관계에서 이미 분열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왜 후일 신성로마제국이라 불리게 되었을까요? 왜 교황은 콘스탄티노플에 이미 황제가 있음에도 또 다른 황제를 세우는 선택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 선택은 왜 동방교회와의 갈등으로 이어지게 되었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웠던 유럽이 샤를마뉴에 의해 통합되고, 그 통합이 역설적으로 기독교 세계의 분열로 이어지게 된 과정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2. 서로마 제국의 몰락과 프랑크 왕국의 형성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습니다. 수도 로마가 함락되고, 마지막 황제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면서 고대 로마의 한 시대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폐허 위에 곧바로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럽은 오랫동안 정치적 혼란과 문화적 단절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러한 혼란의 중심에는 게르만족의 이동과 정착이 있었습니다. 게르만족은 북유럽과 동유럽에서 로마 제국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가던 여러 민족 집단들의 총칭으로, 로마인들은 이들을 ‘야만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야만인’들은 서로마 제국이 무너지자 이들은 서유럽 전역으로 퍼져 각자의 왕국을 세웠고, 로마와 기독교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세 유럽을 형성했습니다.
서고트족은 오늘날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에 정착하여 히스파니아 왕국을 세웠고, 동고트족은 이탈리아에 진출해 북부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반달족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까지 이동했고, 란고바르드족은 북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크족은 갈리아, 오늘날의 프랑스와 독일 일부 지역에 자리 잡고 강력한 세력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이들 왕국은 처음에는 로마와는 전혀 다른 문화, 법률, 언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로마의 유산과 기독교 문화에 영향을 받으며 융합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특히 프랑크족은 이 과정에서 가장 빠르고 성공적으로 변화에 적응한 민족이었습니다.
프랑크족의 왕이었던 클로비스(Clovis)는 ‘중세 유럽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매우 중요한 선택을 합니다. 그는 496년경 프랑크왕국의 수도 랭스(Reims)에서 랭스의 주교였던 성 레미의 집례로 세례를 받고 로마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전통적인 게르만 신을 버리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개종한 최초의 게르만 왕이 되었던 이유는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치적으로는 로마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던 옛 로마의 갈리아 지역 귀족들과 교회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였습니다. 둘째,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었던 아내 클로틸다의 영향과 알레만니족과의 전투 중 “그리스도여, 이기게 해주시면 믿겠습니다”고 서원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단이었던 아리우스파를 믿던 다른 게르만 부족들과 구분되는 정통 신앙을 통해 로마 가톨릭의 지지를 얻을 뿐만 아니라, 집단 개종을 통해서 프랑크족 안에서 정치와 종교를 통합한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 결정은 단순히 여러 종교들 가운데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프랑크 왕국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정치적으로 연합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클로비스 혼자서 기독교인이 된 것이 아니라, 전승에 의하면, 클로비스 왕과 프랑크 족 3000명이 집단개종을 하였는데, 클로비스의 개종으로 교회는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비록 프랑크 왕국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빠른 시간에 유럽에 뿌리를 내리기는 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프랑크 왕국은 내부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메로빙거 왕조 말기에는 왕이 있으되 실권은 없는 '허수아비 왕'이 되었고, 그 틈을 타 실제적인 권력을 쥔 사람들은 왕궁에서 행정을 담당하던 궁재(Mayor of the Palace)였습니다. 이 궁재 가문에서 등장한 인물이 카롤루스 마르텔(Charles Martel)입니다. 그는 732년, 이슬람 세력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들을 물리치며 유럽을 지켜낸 영웅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 전투는 기독교 유럽의 정체성을 지켜낸 역사적 분기점이기도 했습니다.
3. 샤를마뉴의 대관식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Pepin the Short)는 실권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황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물었습니다.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와 명목상 왕이라 불리는 자 중 누가 진정한 왕이어야 합니까?" 교황은 피핀의 입장을 지지했고, 751년 피핀은 교황의 승인 하에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로써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가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바로 샤를마뉴(Charlemagne)였습니다. 샤를마뉴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뿐만 아니라, 정치적 통찰력과 신앙적 열정을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의 정복 전쟁을 통해 유럽 대륙의 절반 이상을 통일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했습니다.
샤를마뉴는 영토 확장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복한 영토를 하나의 질서 있는 공동체로 다스리고자 했으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기독교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주교와 수도원을 행정과 선교의 거점으로 활용했습니다. 샤를마뉴는 정복지마다 교회를 세우고 성직자들을 교육하며, 기독교적 질서를 유럽 전역에 뿌리내리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샤를마뉴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은 무력 정복을 넘어선 문화의 부흥이었습니다. 이 시기를 우리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당시 유럽은 오랜 전쟁과 혼란으로 문해율이 떨어지고 고전 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를 우려한 샤를마뉴는 영국 요크 출신의 학자 알퀸(Alcuin)을 궁정으로 초빙했습니다. 알퀸을 중심으로 왕궁과 수도원에 학교가 설립되었고, 고전 라틴어 문법과 수사학, 신학과 성경 해석이 다시 체계적으로 교육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카롤링거 소문자라는 새로운 필체도 개발되었습니다. 이 읽기 쉽고 정돈된 문자는 이후 중세와 근대 유럽의 필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4. 샤를마뉴의 대관식과 서로마제국의 부활, 그리고 교회의 분열
샤를마뉴의 위상은 점차 높아졌고, 마침내 800년 성탄절 아침,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3세(Leo III)는 미사 도중 샤를마뉴에게 다가가 황제의 관을 씌웠습니다. 이 장면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즉위식으로 보였지만, 그 의미는 매우 깊고 복잡했습니다. 샤를마뉴의 대관식이 중세교회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하는 이유는 다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대관식은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상징했습니다. 둘째, 교황이 황제를 직접 임명함으로써, 교황의 권위가 세속 권력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셋째,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에 이미 황제가 존재했음에도 서방에서 새로운 로마 황제가 세워졌다는 점에서 정치적 충돌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한편, 샤를마뉴는 이 대관식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이를 교황이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수세기 동안 교황과 황제의 권위 문제는 유럽 정치의 핵심 갈등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샤를마뉴(Charlemagne)"입니다. 그는 게르만족인 프랑크족의 왕으로, 유럽 서부를 통일하고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800년,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왕이 제국의 황제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서방의 로마 제국'이 부활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는 이미 로마 황제가 있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로마의 정통 계승자라고 여기고 있었고, 샤를마뉴를 황제로 세운 서방 교회는 이를 무시하고 자체적인 정통성을 세운 셈이었습니다. 즉, 하나의 기독교 세계에 두 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의 행보에 깊은 불만을 품게 되었고, 양측의 정치적 긴장은 신학적 논쟁으로 번져갔습니다.
5. 정치적 분열에서 교회의 분열로: 동방과 서방의 갈라짐
샤를마뉴의 제국이 서방 교회와 로마 교황청 중심의 세계를 정비했지만, 그 반대편에는 전혀 다른 정체성과 질서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동로마 제국과 동방 교회였습니다. 동방 교회, 즉 비잔틴 교회는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 총대주교와 황제가 함께 교회를 다스리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교황 중심의 서방 교회와는 달리, 황제가 교회 문제에까지 관여하는 카이사로파피즘(Caesaropapism)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1054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는 서로를 파문하며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동서 교회의 대분열'로 불립니다. 이로써 로마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 정교회가 공식적으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분열은 단순히 1054년 하루 만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샤를마뉴의 대관식, 교황권의 강화, 교리 해석의 차이, 문화적 분열, 그리고 서로에 대한 정치적 견제가 오랜 세월 축적된 결과, 두 교회는 더 이상 서로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교회 구조와 언어, 문화, 정치 질서는 점차 갈등으로 이어졌고, 그중 대표적인 신학적 쟁점이 바로 '필리오케(Filioque)' 논쟁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공통으로 고백하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qui ex Patre procedit)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서방 교회는 여기에 "성자로부터도"(Filioque)라는 문구를 추가했습니다. 이로써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qui ex Patre Filioque procedit)라는 새로운 고백이 탄생했습니다. 이 작은 단어 하나의 차이는 교리적으로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 차이를, 정치적으로는 교황이 일방적으로 신경을 변경할 수 있는 권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교회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이 분열이 공식화된 시점이 1054년의 "동서 교회의 대분열(Great Schism)"일 뿐입니다. 이 균열의 시작은 샤를마뉴의 제국 성립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방 교회는 로마 교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했고, 동방 교회는 자치적이고 지역 교회 중심의 질서를 고수했습니다. 언어, 정치, 문화, 교리, 예식, 교회 구조 등 모든 면에서 두 교회는 점차 달라졌고, 결국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하나의 믿음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였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로 불렸고, 서로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신앙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연합은 점차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로마 제국의 정치적 분열이었습니다. 서기 395년, 로마 제국은 동서로 나뉘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은 로마를 중심으로 라틴어 문화권에 속했으며, 동로마 제국, 곧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폴을 중심으로 그리스어 문화권에 속했습니다. 서로마는 서기 476년에 멸망했지만, 동로마는 천 년 가까이 존속하며 여전히 로마 황제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동서 양 제국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 언어적, 종교적 정체성에서도 점점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7강: 샤를마뉴 제국의 성립과 기독교 세계의 분열
1. 서론적 질문: 하나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왜 두 개의 교회 –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 로 나뉘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중세 유럽 역사와 중세 교회사를 공부할 때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문제입니다. 초대 교회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공동체(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하나됨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단들의 가르침으로 교회 내부에 균열이 생겼고, 교회와 정치권력과의 밀접한 관계는 믿음의 순수성을 위협했습니다. 교회는 이제 단순한 신앙 공동체를 넘어 세속 권력과 결합한 조직이 되어갔고, 그 안에서 정통성과 권위,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깊어져 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주제는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샤를마뉴의 등장과 그가 세운 제국, 그리고 그 제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세 서유럽의 새로운 질서는 겉으로는 강력하고 통일된 기독교 세계를 만들어낸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특히 동방교회와의 관계에서 이미 분열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왜 후일 신성로마제국이라 불리게 되었을까요? 왜 교황은 콘스탄티노플에 이미 황제가 있음에도 또 다른 황제를 세우는 선택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 선택은 왜 동방교회와의 갈등으로 이어지게 되었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웠던 유럽이 샤를마뉴에 의해 통합되고, 그 통합이 역설적으로 기독교 세계의 분열로 이어지게 된 과정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2. 서로마 제국의 몰락과 프랑크 왕국의 형성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습니다. 수도 로마가 함락되고, 마지막 황제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면서 고대 로마의 한 시대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폐허 위에 곧바로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럽은 오랫동안 정치적 혼란과 문화적 단절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러한 혼란의 중심에는 게르만족의 이동과 정착이 있었습니다. 게르만족은 북유럽과 동유럽에서 로마 제국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가던 여러 민족 집단들의 총칭으로, 로마인들은 이들을 ‘야만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야만인’들은 서로마 제국이 무너지자 이들은 서유럽 전역으로 퍼져 각자의 왕국을 세웠고, 로마와 기독교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세 유럽을 형성했습니다.
서고트족은 오늘날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에 정착하여 히스파니아 왕국을 세웠고, 동고트족은 이탈리아에 진출해 북부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반달족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까지 이동했고, 란고바르드족은 북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크족은 갈리아, 오늘날의 프랑스와 독일 일부 지역에 자리 잡고 강력한 세력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이들 왕국은 처음에는 로마와는 전혀 다른 문화, 법률, 언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로마의 유산과 기독교 문화에 영향을 받으며 융합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특히 프랑크족은 이 과정에서 가장 빠르고 성공적으로 변화에 적응한 민족이었습니다.
프랑크족의 왕이었던 클로비스(Clovis)는 ‘중세 유럽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매우 중요한 선택을 합니다. 그는 496년경 프랑크왕국의 수도 랭스(Reims)에서 랭스의 주교였던 성 레미의 집례로 세례를 받고 로마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전통적인 게르만 신을 버리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개종한 최초의 게르만 왕이 되었던 이유는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치적으로는 로마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던 옛 로마의 갈리아 지역 귀족들과 교회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였습니다. 둘째,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었던 아내 클로틸다의 영향과 알레만니족과의 전투 중 “그리스도여, 이기게 해주시면 믿겠습니다”고 서원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단이었던 아리우스파를 믿던 다른 게르만 부족들과 구분되는 정통 신앙을 통해 로마 가톨릭의 지지를 얻을 뿐만 아니라, 집단 개종을 통해서 프랑크족 안에서 정치와 종교를 통합한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 결정은 단순히 여러 종교들 가운데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프랑크 왕국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정치적으로 연합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클로비스 혼자서 기독교인이 된 것이 아니라, 전승에 의하면, 클로비스 왕과 프랑크 족 3000명이 집단개종을 하였는데, 클로비스의 개종으로 교회는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비록 프랑크 왕국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빠른 시간에 유럽에 뿌리를 내리기는 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프랑크 왕국은 내부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메로빙거 왕조 말기에는 왕이 있으되 실권은 없는 '허수아비 왕'이 되었고, 그 틈을 타 실제적인 권력을 쥔 사람들은 왕궁에서 행정을 담당하던 궁재(Mayor of the Palace)였습니다. 이 궁재 가문에서 등장한 인물이 카롤루스 마르텔(Charles Martel)입니다. 그는 732년, 이슬람 세력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들을 물리치며 유럽을 지켜낸 영웅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 전투는 기독교 유럽의 정체성을 지켜낸 역사적 분기점이기도 했습니다.
3. 샤를마뉴의 대관식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Pepin the Short)는 실권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황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물었습니다.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와 명목상 왕이라 불리는 자 중 누가 진정한 왕이어야 합니까?" 교황은 피핀의 입장을 지지했고, 751년 피핀은 교황의 승인 하에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로써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가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바로 샤를마뉴(Charlemagne)였습니다. 샤를마뉴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뿐만 아니라, 정치적 통찰력과 신앙적 열정을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의 정복 전쟁을 통해 유럽 대륙의 절반 이상을 통일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했습니다.
샤를마뉴는 영토 확장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복한 영토를 하나의 질서 있는 공동체로 다스리고자 했으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기독교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주교와 수도원을 행정과 선교의 거점으로 활용했습니다. 샤를마뉴는 정복지마다 교회를 세우고 성직자들을 교육하며, 기독교적 질서를 유럽 전역에 뿌리내리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샤를마뉴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은 무력 정복을 넘어선 문화의 부흥이었습니다. 이 시기를 우리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당시 유럽은 오랜 전쟁과 혼란으로 문해율이 떨어지고 고전 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를 우려한 샤를마뉴는 영국 요크 출신의 학자 알퀸(Alcuin)을 궁정으로 초빙했습니다. 알퀸을 중심으로 왕궁과 수도원에 학교가 설립되었고, 고전 라틴어 문법과 수사학, 신학과 성경 해석이 다시 체계적으로 교육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카롤링거 소문자라는 새로운 필체도 개발되었습니다. 이 읽기 쉽고 정돈된 문자는 이후 중세와 근대 유럽의 필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4. 샤를마뉴의 대관식과 서로마제국의 부활, 그리고 교회의 분열
샤를마뉴의 위상은 점차 높아졌고, 마침내 800년 성탄절 아침,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3세(Leo III)는 미사 도중 샤를마뉴에게 다가가 황제의 관을 씌웠습니다. 이 장면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즉위식으로 보였지만, 그 의미는 매우 깊고 복잡했습니다. 샤를마뉴의 대관식이 중세교회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하는 이유는 다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대관식은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상징했습니다. 둘째, 교황이 황제를 직접 임명함으로써, 교황의 권위가 세속 권력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셋째,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에 이미 황제가 존재했음에도 서방에서 새로운 로마 황제가 세워졌다는 점에서 정치적 충돌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한편, 샤를마뉴는 이 대관식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이를 교황이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수세기 동안 교황과 황제의 권위 문제는 유럽 정치의 핵심 갈등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샤를마뉴(Charlemagne)"입니다. 그는 게르만족인 프랑크족의 왕으로, 유럽 서부를 통일하고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800년,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왕이 제국의 황제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서방의 로마 제국'이 부활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는 이미 로마 황제가 있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로마의 정통 계승자라고 여기고 있었고, 샤를마뉴를 황제로 세운 서방 교회는 이를 무시하고 자체적인 정통성을 세운 셈이었습니다. 즉, 하나의 기독교 세계에 두 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의 행보에 깊은 불만을 품게 되었고, 양측의 정치적 긴장은 신학적 논쟁으로 번져갔습니다.
5. 정치적 분열에서 교회의 분열로: 동방과 서방의 갈라짐
샤를마뉴의 제국이 서방 교회와 로마 교황청 중심의 세계를 정비했지만, 그 반대편에는 전혀 다른 정체성과 질서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동로마 제국과 동방 교회였습니다. 동방 교회, 즉 비잔틴 교회는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 총대주교와 황제가 함께 교회를 다스리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교황 중심의 서방 교회와는 달리, 황제가 교회 문제에까지 관여하는 카이사로파피즘(Caesaropapism)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1054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는 서로를 파문하며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동서 교회의 대분열'로 불립니다. 이로써 로마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 정교회가 공식적으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분열은 단순히 1054년 하루 만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샤를마뉴의 대관식, 교황권의 강화, 교리 해석의 차이, 문화적 분열, 그리고 서로에 대한 정치적 견제가 오랜 세월 축적된 결과, 두 교회는 더 이상 서로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교회 구조와 언어, 문화, 정치 질서는 점차 갈등으로 이어졌고, 그중 대표적인 신학적 쟁점이 바로 '필리오케(Filioque)' 논쟁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공통으로 고백하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qui ex Patre procedit)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서방 교회는 여기에 "성자로부터도"(Filioque)라는 문구를 추가했습니다. 이로써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qui ex Patre Filioque procedit)라는 새로운 고백이 탄생했습니다. 이 작은 단어 하나의 차이는 교리적으로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 차이를, 정치적으로는 교황이 일방적으로 신경을 변경할 수 있는 권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교회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이 분열이 공식화된 시점이 1054년의 "동서 교회의 대분열(Great Schism)"일 뿐입니다. 이 균열의 시작은 샤를마뉴의 제국 성립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방 교회는 로마 교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했고, 동방 교회는 자치적이고 지역 교회 중심의 질서를 고수했습니다. 언어, 정치, 문화, 교리, 예식, 교회 구조 등 모든 면에서 두 교회는 점차 달라졌고, 결국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하나의 믿음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였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로 불렸고, 서로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신앙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연합은 점차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로마 제국의 정치적 분열이었습니다. 서기 395년, 로마 제국은 동서로 나뉘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은 로마를 중심으로 라틴어 문화권에 속했으며, 동로마 제국, 곧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폴을 중심으로 그리스어 문화권에 속했습니다. 서로마는 서기 476년에 멸망했지만, 동로마는 천 년 가까이 존속하며 여전히 로마 황제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동서 양 제국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 언어적, 종교적 정체성에서도 점점 달라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