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사]8강: 중세교회사속의 동방교회

관리자
2025-04-08

중세교회사 8강: 중세교회사 속의 동방교회

 

1. 서론적 질문: 동방정교회 전통에 대해서 아는 것이 왜 필요할까요?


 중세교회사를 다룰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 교회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중세교회사에 해당되는 시기에도 기독교의 절반은 동방에 존재했으며, 특히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등 고대 교회 중심지들은 중세에도 여전히 활발한 신학 활동과 교회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054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서로를 파문하면서 완전히 갈라서기 이전부터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문화적 정치적으로 균열이 있었으나, 신학적인 명분을 제공했던 것은 ‘filioque’ 논쟁입니다. 말하자면, 신학적인 논쟁은 명분에 불과하였고 실제적인 분열은 로마 교회의 수위권 주장과 동방황제로부터의 정치적인 독립과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의 중심이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등을 중심으로하는 동방교회에 있었으나, 레오 때부터 실제적인 교황제도가 성립되면서 교회의 중심이 로마가 되었다는 주장은 로마 중심 및 서유럽 중심의 교회사 서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이 된 이후에 또다시 서방교회 내에서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분리되었지만,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정통교회는 그 뿌리가 신학적으로 또 지리적으로는 동방교회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정통교회로서의 위상을 간직한 동방정교회에 대하여 칼케돈 공의회 이후부터 1054년 동서 교회의 대분열까지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이를 통해 동방교회의 정체성과 중세교회사에서의 위치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2. 동방교회의 자아정체성

 

  유대-로마 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주후 70년 이후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소아시아로 이동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 이르러 라틴문화권의 서방교회가 신학적인 흐름에서 주도권을 잡았지만, 그때까지도 동방교회에는 그 영향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주후 5세기 서방세계의 몰락을 가져온 게르만족의 침입은 서방교회를 후퇴시킨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동방교회 및 동로마제국의 황제와 관계를 단절하고 독자적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명분을 얻게되었습니다.

  서방교회는 중세시대를 초대교회와 초대교회가 다시 회복되기까지의 중간기간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동방교회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동방교회는 교부들의 시대가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라 비잔티움(Byzantium)을 수도로 하는 비잔틴 그리스도교 제국(Byzantine Christian Empire)에 의하여 계승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동로마제국과 동방교회는 모두 황제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황제는 교회회의를 소집하고 교회회의의 최종적인 결정사항을 인준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들 가운데 가장 위대했던 인물은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로 527년부터 565년까지 재위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통치는 비잔틴 제국의 정점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하기아 소피아를 건립한 것과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집대성한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은 그 다음 세기에 일어난 이슬람교도들의 침략으로 쇠퇴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7세기 중엽, 무함마드(Muhammad)가 632년에 죽고, 그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슬람 군대는 현재 튀르키예 남쪽과 동쪽에 위치했던 비잔틴 제국을 완전히 정복하였습니다. 이후의 공세는 완만하였으나 결국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Istanbul)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복이 곧 그 땅에 있던 모든 교회들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이슬람의 지배자들은 이류 시민으로 다루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심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인내는 그리스도들에게 암묵적인 협조를 요구하는 것이었지, 이슬람교로 개종할 것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의 콥틱교회(Coptic Church)는 오늘날까지 전체 인구의 십 퍼 센트가 넘고 있으며, 이집트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주후 십세기 러시아가 정교회(Orthodox Christianity)에 합류함으로서 동방교회는 잃어버렸던 교세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였습니다. 동방교회는 칼케돈 공의회 이후 몇 세기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논쟁에서 주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 칼케돈 공의회 이후 1054년 까지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하여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할 없이, 분리 없이’ 하나의 위격 안에 존재한다는 이른바 ‘두본성 한위격’(Dyophysitism) 교리를 채택하였습니다. 이는 교리적 정통을 확립하려는 시도였지만, 동시에 동방교회 내 많은 교회들을 이탈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콥트 교회, 시리아의 야곱파, 아르메니아 교회 등은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사항을 거부하며 한본성교리, 곧 단성론(Monophysitism) 전통을 유지하였고, 이는 오늘날의 오리엔트 정교회로 이어져 내려옵니다. 이들 교회는 정치적, 문화적, 언어적 이유로도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비잔틴 제국 교회와 점차 분리되어 갔습니다. 이 시기는 동방교회 내부의 균열이 심화된 시기로, 단지 교리뿐 아니라 제국 권력과의 관계, 지역 정체성 등이 얽혀 있었던 복합적인 분열의 시기였습니다.

  이집트교회를 포함한 동방교회 내의 여러 교회들은 이 공의회의 결과를 끝까지 수용하지 않았는데, 이들의 입장을 가리켜 단성론파라고 부릅니다. 황제들은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때로 곤란한 입장에 처했습니다. 단성론파들은 칼케돈 공의회의 결과를 부정하고 반-칼케돈파와 화해를 할 수도 있었으나 그것은 로마와 단절하는 의미하는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다른 길은 칼케돈 공의회 결과를 지지하면서 서방교회와의 연합을 추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방교회에 심각한 분열을 가져올 것이 분명히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두 가지 방법 모두 추진되었으나 어느 하나도 만족할만한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슬람교도들이 제국의 방침에 반대하는 교회들이 있던 지역을 정복함으로서 원하는 방법은 아니었으나 긴장은 마침내 해소되었습니다.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y)는 서방교회와 연합 속에서 칼케돈 공의회를 지지하였고, 반-칼케돈파는 그들의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와 비교할 때 전통에 더 많은 권위를 부여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전통에 더 많은 권위를 부여한다는 말의 의미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면 전통이 온전히 유지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통 및 전통의 보전이라는 과제가 교부시대 이후에 동방 교회를 지배해온 관심사였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교리 또는 신앙고백, 그리고 예배와 예전에 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었습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주후 3세기에 서방교회가 라틴어를 사용하면서 언어문제로 분리되었습니다. 주후 4세기에는 삼위일체 교리를 둘러싼 심각한 분열이 있었으나, 381년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동방교회의 화해를 통하여 크게 진정되었다. 그러나 5세기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동방과 서방의 정치적인 연합이 깨어지게 되었고, 두 교회는 서로 갈라져 각각의 길을 가기 시작하였는데, 이 모든 과정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주후 800년에 들어서면서 로마의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교황 레오 3세가 800년 성탄절에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진행한 샤를마뉴의 대관식으로 프랑크 왕국의 통치자가 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동방교회 및 동방황제와 서방교회를 갈라서게 만든 기초가 된 사건으로 옛 서로마제국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프랑크족의 왕 샤를마뉴가 로마 교회의 실제적인 수호자로 인정받고 비잔틴 제국의 황제와는 단절을 선언한 것입니다.

  결국 1054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갈등은 상호 파문이라는 상징적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오해나 인물 간의 문제를 넘어서, 이미 수세기 동안 누적되어 온 신학적, 문화적, 정치적 갈등의 표출이었습니다. 필리오케 논쟁, 교황의 수위권 문제, 전례의 차이 등 다양한 요소들이 분열을 가속화시켰습니다. 1054년의 분열은 결과적으로 서방의 로마 가톨릭과 동방의 정교회라는 두 개의 상이한 기독교 전통이 각자의 길을 걷게 된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4. 마지막 교부: 다마스커스의 요한


  요한 만사워(John Mansour)는 약 650년경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시리아는 이슬람의 통치 하에 있었고, 요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칼리프를 위해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후에 자기 직업을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고, 75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한은 마지막 동방교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성과는 초대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체계적인 입문서를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하였습니다.


일벌처럼 나는 진리를 따르는 모든 것들을 취합해야 합니다. 그것이 설사 우리의 적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도 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나의 결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신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도달한 이 성과들을 나는 그저 취합하고 정리하여 가능한 한에서 하나의 논문으로 담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논증”(Dialectic) 서문


  이 글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지식의 원천』(Fount of Knowledge)에 앞부분에 나오는데, 이 책은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논증(Dialectic)”: 철학적 용어들과 개념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교리들에 사용된 용어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이단 개요(Heresies in Epitome)”: 103개에 달하는 이단들에 관하여 짧게 설명하고 있고,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403)와 데오도렛의 초기 작품들에 많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 “정통 신앙 해설(Exact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그리스 교부들의 가르침을 100장(chapter)에 걸쳐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후에 네 권의 책으로 분리하였습니다. 특별히 삼위일체 교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교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갑파도키아의 교부들의 가르침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해서는 칼케돈 공의회의 가르침을 해설하였고, 고백자 막시무스의 교리를 보충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가 두 자연적인 의지와 두 자연적인 역사를 가지고 계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한 본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 본성 안에 의지들과 역사들을 가지고 계신 분이 한분이며 동일한 분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고 그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제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논쟁을 통한 그리스도론의 확립은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비교할 때 추상적이고 불확실한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동안 이루어진 고소와 정죄의 이유가 복음서가 전하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보다는 “신앙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는 성자 하나님은 역사적 예수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그리스도 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또한 성상, 혹은 아이콘 논쟁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성상파괴운동(iconoclast)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하여 세 권으로 구성된 『거룩한 형상을 지키기 위하여(Orations in Defence of Sacred Images)』를 저술하였습니다. 요한은 성상파괴를 결의한 히에리아 공의회 (Council of Hieria, 754)에서 파문당하였으나, 787년의 니케아공의회에서는 그의 주장이 우세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