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사 9강: 십자군전쟁의 시작과 라틴왕국의 성립
1. 서론적 질문: 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vult)'는 구호 아래 예루살렘으로 향했을까요?
이 질문은 중세 유럽 교회사를 공부할 때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물음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거룩한 땅입니다. 그러나 11세기 당시, 이 성지는 이슬람 세력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유럽인들은 그것을 ‘잃어버린 성지’라고 여겼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단지 종교적 열정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배경에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동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그 중심에는 교황권 강화와 유럽 질서의 재편이라는 큰 흐름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vult).’ 이 짧은 구호는 중세 유럽 전역을 뒤흔든 외침이었습니다. 신앙적 외침으로 포장된 이 말은 기독교 역사상, 아니 인류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 십자군 전쟁의 핵심모토였습니다. 이 구호는 신앙적 열정과 인간의 욕망이 결합된 신념에 종교의 옷을 입혔고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표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외침은 살인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진정 하나님의 뜻이라 믿었고, 그 믿음은 수만 명의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이 질문을 다신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이 질문은 단지 과거의 신앙적 열정을 향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이름으로 행해진 역사적 사건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를 묻게 합니다.
실제로, 2000년 3월 12일,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주재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하느님의 자비를 위한 참회 주일'(Day of Pardon)을 통해,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 등 과거 교회의 폭력에 대해 공식적으로 참회했습니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들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합니다. 특히,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 종교 재판 등에서 드러난 폭력과 강압에 대해 깊이 참회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중세 교회사의 사건들을 단지 과거의 일로만 보지 않고, 오늘의 신앙과 교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책임질 것인가를 묻는 하나의 시작점이 됩니다.
2. 역사적 배경: 비잔틴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의 충돌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샤를마뉴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씌우면서, 서방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은 비잔틴 제국 및 동방 교화와 점점 분리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서로를 파문하며 ‘동서 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났고, 이후 서방은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한 정치 및 종교질서를 구축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긴장 속에서도, 다시 손을 맞잡게 되는 계기가 생깁니다. 그 전환점은 11세기 중반 이슬람 세계에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s)가 등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는 수니파 이슬람을 신봉하며 동방에서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했고, 마침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핵심 지역인 아나톨리아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은 셀주크 투르크에게 참패했고, 그 결과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상실하게 됩니다. 주요 영토를 잃은 제국은 세금 징수와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고,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생존마저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 때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Alexios I Komnenos: 재위 1081-1118)는 서방의 로마 교황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게 됩니다. 이 요청은 단순히 편지를 보내는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1095년 3월, 황제는 사절단을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피아첸차(Piacenza)로 파견하여, 그곳에서 열리고 있던 피아첸차 공의회(Council of Piacenza)에 참석 중이던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 II: 재위 1088-1099)와 직접 접촉하게 합니다. 이 자리에서 비잔틴 사절은 다음과 같은 긴급한 사정을 전합니다: "셀주크 투르크로 인해 아나톨리아는 상실되었고, 콘스탄티노플조차 위협받고 있다. 이는 단지 비잔틴 제국만의 위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전체의 위기이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단지 용병의 파견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서방 세계 전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동방 형제들을 돕기 위한 신앙적 연대를 호소한 것이었습니다. 교황에게는 군사동원령을 내릴 권한이나 군사작전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 요청은 단순한 외교적 조치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곧,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동서 교회가 일시적으로 손을 맞잡는 역사적 순간이 될 수도 있었고, 동시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정치적 연합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은 자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군사적 지원을 절실히 원했기에, 단순히 신성로마제국의 군대 뿐만 아니라 교황의 영향력이 미치는 서방세계 전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종교적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반면 서방교회, 특히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를 교황권 강화와 라틴 기독교 세계의 확장을 위한 기회로 삼고자 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은 절박함 속에서 구원을 요청했지만, 서방교회는 십자군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종교적 정치적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군 전쟁은 단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성지 회복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작부터 이미 신앙과 생존, 정치와 권력, 동방과 서방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3. 클레르몽 공의회와 제1차 십자군
비잔틴 제국의 요청은 서방 세계를 깊이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 요청을 받아들인 이는 바로 교황 우르바노 2세였습니다. 1095년, 그는 교황으로서 유럽 전역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역사적 기회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해 11월, 프랑스 중부의 도시 클레르몽(Clermont)에서 열린 공의회(Council of Clermont)는 중세 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기점이 됩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우르바노 2세는 역사적인 연설을 통해 제1차 십자군의 시작을 선포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성지 예루살렘이 이교도의 손에 더럽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모욕당하고 있으며, 우리 형제들은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무기를 들고 일어서십시오. 불의를 참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전쟁은 죄를 씻는 전쟁이 될 것입니다. Deus vult! ―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이 구호는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옷깃에 십자가를 꿰매고, 십자군(Cruciati)이라는 이름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단지 종교적 명령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자신의 죄 사함과 천국의 영광을 보장받으리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그 여정은 곧 유럽 사회 전체에 내려진 군사동원령과도 같았습니다. 귀족과 기사들, 수도자와 평민,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구호와 십자가 깃발 아래에서 성지를 향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을 떠났습니다. 누군가는 신앙적 열정으로, 누군가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누군가는 모험과 명예를 위해, 또 누군가는 토지와 부를 얻기 위해 이 여정에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동기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 바로,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5년 작 영화 『킹덤 어브 헤븐(Kingdom of Heaven)』입니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의도는 단지 신앙의 구호를 외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서유럽 전체를 교황권 아래 재편하고자 하는 정치적 비전을 품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 연설을 전후로 유럽 각국의 제후들에게 교황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했고, 십자군의 지휘 역시 세속 군주가 아닌 교황이 소집하고 승인하는 형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로써 중세 교황권은 전례 없는 영향력을 얻게 되었고, 교회는 단순한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유럽의 정치적 군사적 질서를 주도하는 중심 권력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운동의 출발점에 놓인 구호-"Deus vult!"(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정말 하나님이 원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이 물음 앞에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십자군 전쟁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신앙의 열정이 인간의 욕망, 정치적 신념과 결합할 때, 그 외침은 과연 어디로 향하는가? 그 결과는 무엇을 남기는가?“
4. 예루살렘 정복과 라틴왕국의 성립
1096년,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vult)”는 외침 아래, 수많은 무리가 성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혼란과 비극이었습니다. 먼저 출발한 이들은 ‘민중 십자군(People’s Crusade)’이라 불렸습니다. 이들은 농민, 떠돌이, 심지어 어린이까지 포함된 조직력 없는 무리로, 훈련도 장비도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하는 등 이미 출발부터 신앙의 이름 아래 폭력을 행사했고, 결국 대부분은 소아시아에서 셀주크 투르크에게 몰살당하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습니다.
그 뒤를 이은 정규 십자군은 귀족과 기사 중심의 군대였습니다. 그들은 네 갈래의 주요 행로를 따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고,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이들과 조심스러운 동맹을 맺습니다. 십자군은 니케아, 안티오크, 에데사 등을 차례로 점령하며 진격했고, 마침내 1099년 7월, 예루살렘 성 앞에 도달합니다.
성벽을 포위한 후 약 한 달 뒤, 십자군은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정복의 날은 신앙의 승리가 아닌 피로 얼룩진 날이었습니다. 중세 연대기 작가 퓌셰 드 샤르트르(Foucher de Chartres)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루살렘 거리에는 발목까지 피가 흥건했다.” 십자군은 무슬림뿐 아니라 유대인, 심지어 기독교인을 구분하지 않고 학살했고, 성전은 불탔으며, 성 안은 약탈당했습니다. 이방인의 피 위에서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외친 그날, 신앙과 폭력은 비극적인 동맹을 맺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정복된 후, 십자군은 그 땅에 ‘라틴 왕국’을 세웁니다. 초대 통치자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Godfrey of Bouillon)이었고, 그는 “왕(King)”이라는 칭호를 거부하고 “성묘의 수호자(Advocatus Sancti Sepulchri)”라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그가 세속 군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 이 땅을 다스린다는 상징적 선언이었습니다. 라틴 왕국은 서유럽식 봉건 질서와 라틴 교회 제도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동방 정교회의 성직자들은 배제되었고, 로마 교황청의 권위 아래 라틴식 교회조직이 세워졌습니다. 성직자와 기사, 순례자 중심의 사회가 형성되었으며, 유럽식 성채와 수도원이 성지 곳곳에 들어섰습니다. 예루살렘외에도 안티오크 공국, 트리폴리 백국, 에데사 백국 등이 세워지며, 십자군 국가들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왕국은 구조적으로 매우 취약했습니다. 주변을 둘러싼 이슬람 세력과의 끊임없는 충돌, 서방 세계와의 지리적 거리로 인한 보급의 어려움, 동방 교회와의 문화적 긴장, 그리고 십자군 내부의 이권 다툼은 왕국의 생존을 위협했습니다.
1187년, 살라딘(Saladin)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의 손에 들어갑니다. 고드프루아의 수호자라는 꿈은, 채 100년도 못 되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십자군은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구호 아래 시작되었지만, 그 여정은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했는가를 오늘의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 말은 언제나 진리를 가리키는 나침반이었습니까? 아니면, 그 말이 인간의 정치적 욕망과 정복의 욕심에 의해 얼마든지 도구화될 수 있었던 것임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중세교회사 9강: 십자군전쟁의 시작과 라틴왕국의 성립
1. 서론적 질문: 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vult)'는 구호 아래 예루살렘으로 향했을까요?
이 질문은 중세 유럽 교회사를 공부할 때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물음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거룩한 땅입니다. 그러나 11세기 당시, 이 성지는 이슬람 세력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유럽인들은 그것을 ‘잃어버린 성지’라고 여겼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단지 종교적 열정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배경에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동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그 중심에는 교황권 강화와 유럽 질서의 재편이라는 큰 흐름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vult).’ 이 짧은 구호는 중세 유럽 전역을 뒤흔든 외침이었습니다. 신앙적 외침으로 포장된 이 말은 기독교 역사상, 아니 인류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 십자군 전쟁의 핵심모토였습니다. 이 구호는 신앙적 열정과 인간의 욕망이 결합된 신념에 종교의 옷을 입혔고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표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외침은 살인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진정 하나님의 뜻이라 믿었고, 그 믿음은 수만 명의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이 질문을 다신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이 질문은 단지 과거의 신앙적 열정을 향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이름으로 행해진 역사적 사건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를 묻게 합니다.
실제로, 2000년 3월 12일,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주재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하느님의 자비를 위한 참회 주일'(Day of Pardon)을 통해,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 등 과거 교회의 폭력에 대해 공식적으로 참회했습니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들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합니다. 특히,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 종교 재판 등에서 드러난 폭력과 강압에 대해 깊이 참회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중세 교회사의 사건들을 단지 과거의 일로만 보지 않고, 오늘의 신앙과 교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책임질 것인가를 묻는 하나의 시작점이 됩니다.
2. 역사적 배경: 비잔틴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의 충돌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샤를마뉴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씌우면서, 서방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은 비잔틴 제국 및 동방 교화와 점점 분리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서로를 파문하며 ‘동서 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났고, 이후 서방은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한 정치 및 종교질서를 구축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긴장 속에서도, 다시 손을 맞잡게 되는 계기가 생깁니다. 그 전환점은 11세기 중반 이슬람 세계에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s)가 등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는 수니파 이슬람을 신봉하며 동방에서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했고, 마침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핵심 지역인 아나톨리아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은 셀주크 투르크에게 참패했고, 그 결과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상실하게 됩니다. 주요 영토를 잃은 제국은 세금 징수와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고,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생존마저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 때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Alexios I Komnenos: 재위 1081-1118)는 서방의 로마 교황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게 됩니다. 이 요청은 단순히 편지를 보내는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1095년 3월, 황제는 사절단을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피아첸차(Piacenza)로 파견하여, 그곳에서 열리고 있던 피아첸차 공의회(Council of Piacenza)에 참석 중이던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 II: 재위 1088-1099)와 직접 접촉하게 합니다. 이 자리에서 비잔틴 사절은 다음과 같은 긴급한 사정을 전합니다: "셀주크 투르크로 인해 아나톨리아는 상실되었고, 콘스탄티노플조차 위협받고 있다. 이는 단지 비잔틴 제국만의 위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전체의 위기이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단지 용병의 파견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서방 세계 전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동방 형제들을 돕기 위한 신앙적 연대를 호소한 것이었습니다. 교황에게는 군사동원령을 내릴 권한이나 군사작전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 요청은 단순한 외교적 조치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곧,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동서 교회가 일시적으로 손을 맞잡는 역사적 순간이 될 수도 있었고, 동시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정치적 연합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은 자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군사적 지원을 절실히 원했기에, 단순히 신성로마제국의 군대 뿐만 아니라 교황의 영향력이 미치는 서방세계 전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종교적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반면 서방교회, 특히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를 교황권 강화와 라틴 기독교 세계의 확장을 위한 기회로 삼고자 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은 절박함 속에서 구원을 요청했지만, 서방교회는 십자군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종교적 정치적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군 전쟁은 단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성지 회복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작부터 이미 신앙과 생존, 정치와 권력, 동방과 서방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3. 클레르몽 공의회와 제1차 십자군
비잔틴 제국의 요청은 서방 세계를 깊이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 요청을 받아들인 이는 바로 교황 우르바노 2세였습니다. 1095년, 그는 교황으로서 유럽 전역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역사적 기회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해 11월, 프랑스 중부의 도시 클레르몽(Clermont)에서 열린 공의회(Council of Clermont)는 중세 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기점이 됩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우르바노 2세는 역사적인 연설을 통해 제1차 십자군의 시작을 선포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이 구호는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옷깃에 십자가를 꿰매고, 십자군(Cruciati)이라는 이름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단지 종교적 명령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자신의 죄 사함과 천국의 영광을 보장받으리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그 여정은 곧 유럽 사회 전체에 내려진 군사동원령과도 같았습니다. 귀족과 기사들, 수도자와 평민,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구호와 십자가 깃발 아래에서 성지를 향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을 떠났습니다. 누군가는 신앙적 열정으로, 누군가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누군가는 모험과 명예를 위해, 또 누군가는 토지와 부를 얻기 위해 이 여정에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동기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 바로,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5년 작 영화 『킹덤 어브 헤븐(Kingdom of Heaven)』입니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의도는 단지 신앙의 구호를 외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서유럽 전체를 교황권 아래 재편하고자 하는 정치적 비전을 품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 연설을 전후로 유럽 각국의 제후들에게 교황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했고, 십자군의 지휘 역시 세속 군주가 아닌 교황이 소집하고 승인하는 형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로써 중세 교황권은 전례 없는 영향력을 얻게 되었고, 교회는 단순한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유럽의 정치적 군사적 질서를 주도하는 중심 권력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운동의 출발점에 놓인 구호-"Deus vult!"(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정말 하나님이 원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이 물음 앞에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십자군 전쟁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4. 예루살렘 정복과 라틴왕국의 성립
1096년,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vult)”는 외침 아래, 수많은 무리가 성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혼란과 비극이었습니다. 먼저 출발한 이들은 ‘민중 십자군(People’s Crusade)’이라 불렸습니다. 이들은 농민, 떠돌이, 심지어 어린이까지 포함된 조직력 없는 무리로, 훈련도 장비도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하는 등 이미 출발부터 신앙의 이름 아래 폭력을 행사했고, 결국 대부분은 소아시아에서 셀주크 투르크에게 몰살당하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습니다.
그 뒤를 이은 정규 십자군은 귀족과 기사 중심의 군대였습니다. 그들은 네 갈래의 주요 행로를 따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고,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이들과 조심스러운 동맹을 맺습니다. 십자군은 니케아, 안티오크, 에데사 등을 차례로 점령하며 진격했고, 마침내 1099년 7월, 예루살렘 성 앞에 도달합니다.
성벽을 포위한 후 약 한 달 뒤, 십자군은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정복의 날은 신앙의 승리가 아닌 피로 얼룩진 날이었습니다. 중세 연대기 작가 퓌셰 드 샤르트르(Foucher de Chartres)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루살렘 거리에는 발목까지 피가 흥건했다.” 십자군은 무슬림뿐 아니라 유대인, 심지어 기독교인을 구분하지 않고 학살했고, 성전은 불탔으며, 성 안은 약탈당했습니다. 이방인의 피 위에서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외친 그날, 신앙과 폭력은 비극적인 동맹을 맺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정복된 후, 십자군은 그 땅에 ‘라틴 왕국’을 세웁니다. 초대 통치자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Godfrey of Bouillon)이었고, 그는 “왕(King)”이라는 칭호를 거부하고 “성묘의 수호자(Advocatus Sancti Sepulchri)”라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그가 세속 군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 이 땅을 다스린다는 상징적 선언이었습니다. 라틴 왕국은 서유럽식 봉건 질서와 라틴 교회 제도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동방 정교회의 성직자들은 배제되었고, 로마 교황청의 권위 아래 라틴식 교회조직이 세워졌습니다. 성직자와 기사, 순례자 중심의 사회가 형성되었으며, 유럽식 성채와 수도원이 성지 곳곳에 들어섰습니다. 예루살렘외에도 안티오크 공국, 트리폴리 백국, 에데사 백국 등이 세워지며, 십자군 국가들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왕국은 구조적으로 매우 취약했습니다. 주변을 둘러싼 이슬람 세력과의 끊임없는 충돌, 서방 세계와의 지리적 거리로 인한 보급의 어려움, 동방 교회와의 문화적 긴장, 그리고 십자군 내부의 이권 다툼은 왕국의 생존을 위협했습니다.
1187년, 살라딘(Saladin)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의 손에 들어갑니다. 고드프루아의 수호자라는 꿈은, 채 100년도 못 되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십자군은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구호 아래 시작되었지만, 그 여정은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했는가를 오늘의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 말은 언제나 진리를 가리키는 나침반이었습니까? 아니면, 그 말이 인간의 정치적 욕망과 정복의 욕심에 의해 얼마든지 도구화될 수 있었던 것임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