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강: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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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강: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

 

1. 서론적 질문: 왜 위클리프는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라고 불릴까요?

 14세기 영국에서 활동한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s-1384)는 루터보다 150년이나 앞서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로 불렸습니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를 비판하거나 제도를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진정한 개혁은 ‘신앙의 권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묻는 일입니다. 교황인가? 교회 전통인가? 아니면 하나님 말씀인가? 위클리프는 바로 이 질문 앞에서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성경은 신앙과 교회의 모든 권위의 근원이다.” 그는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교회와 신앙은 그 말씀 아래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말씀의 권위’를 이론으로만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백성의 손에 들려주려 했습니다. 그때까지 성경은 라틴어로만 읽혔기 때문에, 평범한 신자들는 사제가 설명하는 만큼만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있었습니다. 위클리프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학자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다.” 그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해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난 곳 방언”으로 복음을 들었던 사건처럼(사도행전 2:8),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신자에게 열려지는 보편화의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14세기 유럽과 영국의 시대적 배경- 흑사병, 전쟁, 기근, 그리고 교회의 몰락 속에서 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박한 외침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야기를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2. 14세기 유럽과 영국의 상황: 흑사병, 전쟁, 기근, 그리고 교황권의 몰락

  14세기의 유럽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였지만, 내면으로는 깊은 균열이 가고 있었습니다. 도시에는 성당의 종소리와 수도원의 기도소리 뒤에는 죽음과 전쟁, 기근과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1) 흑사병 - 죽음이 일상이 되다

  1347년, 흑사병이 퍼져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졌습니다. 사제들과 수도자들마저 흑사병에 의해 쓰러지자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교회는 왜 이 재앙을 막지 못하는가?” 교회는 7성사로 구원의 질서를 설명했지만, 죽음의 현실 앞에서 그 질서는 무기력해 보였습니다.

  2) 백년전쟁의 시작 - 왕관을 두고 벌어진 긴 싸움

  1337년, 영국의 에드워드 3세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10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싸움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영토, 경제, 민족의 자존심,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운 정치가 얽혀있었습니다. 교황은 전쟁을 ‘성전(聖戰)’처럼 포장하며 십자군 면죄부를 팔았고, 왕들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 외치며 백성을 전쟁터로 내보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이 싸움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3) 무너지는 권위 - 왕과 교회 모두의 권위가 흔들리다

  백년전쟁은 왕의 권위를 약화시켰고 교회의 신뢰를 무너뜨렸습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왕의 세금은 늘어났고, 백성들의 불만도 커졌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왕은 더 이상 “하나님의 대리자”로 존경받지 못했습니다. 권위는 신앙의 상징이 아니라, 폭력과 착취의 도구로 여겨졌습니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 자금을 위해 교황청은 면죄부를 판매했고, 교황들은 서로 다른 나라의 왕을 지지하며 정치의 한복판으로 끌려 들어갔습니다. 결국 교회의 영적 권위는 붕괴되었습니다. 교황이 두 명으로 나뉘었던 서방교회의 대분열(1378-1417) 시기에, 영국 사람들은 이렇게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왜 교황은 둘인가?” 그 질문은 위클리프의 신학적 문제의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교황의 권위가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참된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신앙적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3. 위클리프의 생애와 사상 

  존 위클리프는 1328년, 영국 북부 요크셔의 작은 마을 힙스웰(Hipswell)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신학자이자 사제로 성장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책상 위의 논문이 아니라, 교회의 타락 속에서 탄생한 신앙적 고민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의 사상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신앙의 권위는 교황이 아니라 성경에 있다. 둘째, 참된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 공동체다. 셋째, 말씀은 모든 신자가 자기 언어로 읽고 이해해야 한다. 이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위클리프는 일생을 걸었습니다.

1370년대 후반,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의하며 『시민지배론』(De Civili Dominio)과 『교회론』(De Ecclesia) 같은 저서를 집필하며 교회의 재산 남용을 비판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하게 사셨듯, 교회도 가난해야 한다.” 그는 또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예수께서 금관 쓰지 않으셨다면, 그분의 교회를 금으로 장식해서는 안 된다.” 그의 비판은 냉소가 아니라 회복에의 열망이었습니다. 그는 말로 비판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성경 번역이라는 실천으로 나아갔습니다.

 

4. 위클리프의 성경 번역과 종교개혁

  1382년 위클리프와 동료 학자들이 함께 만든 “초역본(early version)”이 완성되었습니다. 위클리프의 성경 번역은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 영어로 옮긴 것이 아니라 라틴어에서 영어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이 번역은 라틴어 어순을 그대로 옮긴 직역체였지만, 사람들에게는 처음으로 자기 언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기적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 제자 존 퍼비(John Purvey)가 문장을 다듬어 1388년경 개정판(later version)을 완성했습니다. 그들은 인쇄기도 없이 한 권 한 권 손으로 필사했기에 한 권을 만드는데 1년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약 250권의 필사본이 남아 있는데, 이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직접 읽고, 필사하고, 나누었다는 증거입니다. 그의 번역은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중심을 교회에서 말씀으로 되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그의 성경 번역은 곧바로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5. 롤라드 운동 ― 개혁의 씨앗이 되다  

  클리프가 떠난 뒤에도 그의 사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롤라드(Lollards)’라 불렸습니다. ‘롤라드’는 ‘중얼거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거리와 농촌에서 조용히 성경을 낭독하며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평신도였지만, 말씀을 손에 들고 나아갔습니다. 예배는 교회가 아니라 마을의 들판, 시장 한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찬송과 말씀,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이 모임들은 교회 제도 밖에서 피어난 신앙 공동체의 첫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곧 박해를 받았습니다. 1401년, 영국 의회는 “이단자를 불태워 죽이는 것에 관하여(De heretico comburendo)” 법을 제정해 이단자를 화형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신앙의 이유로 죽음에 처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정죄했고, 그의 영향을 받은 체코의 얀 후스(John Hus)를 화형에 처했습니다. 후스는 불길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너희는 거위(체코어 후스의 뜻)를 태우지만, 백 년 뒤에는 백조가 일어날 것이다.” 그 예언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영국에서도 롤라드들은 지하로 숨어들었지만, 그들의 신앙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등불처럼 말씀을 품고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력보다 강하고, 불보다 뜨겁고, 시간보다 오래 남는다.”

 

6. 정리: 위클리프의 유산

  존 위클리프가 세상을 떠난 것은 1384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150년이 지난 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문에 95개조를 내걸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불길은 영국의 루터워스에서 시작되었다.” 위클리프는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고, 그의 제자들은 말씀을 손에 들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이 종교개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할 수 있었던 것도, 윌리엄 틴데일이 인쇄기를 통해 영어 성경을 찍어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위클리프가 뿌린 씨앗 덕분이었습니다.

루터는 한때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손에 들고 읽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의 순교자들을 통해 그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바로 그 길의 첫 번째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신앙의 권위를 교황에게서 성경으로 되돌려 놓았고, 성경을 라틴어에서 백성의 언어로 옮겨 놓았습니다. 이 두 가지 일은 단순한 신학적 사건이 아니라, 신앙의 주체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에게 돌아온 사건이었습니다.

  1) 교회는 제도보다 말씀으로

  위클리프는 교회를 비판했지만,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회를 다시 복음의 자리로 돌려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의 개혁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이었습니다. 이 점이 오늘 우리에게도 큰 도전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제도와 프로그램으로 가득할 때,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인가?”

  2) 성경은 모두의 언어로

  위클리프의 꿈은 성경이 모든 사람의 손에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라틴어만 아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언어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의 번역은 단순히 문장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언어가 세상의 언어가 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을 한글로, 또는 스마트폰으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의 번역의 결실 위에 서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펼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3)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

  1428년, 그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유골은 불태워졌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의 재는 스위프트 강에 흘러 들어가, 세상의 모든 바다로 퍼져나갔다.” 그 재는 단지 한 사람의 흔적이 아니라, 말씀의 불씨가 꺼지지 않음을 상징하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 불씨는 후스에게로, 루터에게로, 그리고 우리에게로 이어졌습니다.

  4) 오늘의 우리에게

  위클리프의 삶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의 신앙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당신의 교회는 여전히 말씀 위에 서 있습니까?” 그의 삶은 단순한 역사 속의 이름이 아니라, 말씀으로 다시 깨어나는 신앙의 본보기입니다. 그는 먼 옛날의 개혁자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씀으로 도전하는 동시대의 목소리입니다. 마지막으로, 위클리프의 신앙을 요약하는 한 문장을 함께 기억하고 싶습니다. “성경만이 신앙의 유일한 권위이며 기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