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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말씀
첫째 날 : 성전을 두 번째 청결하게 하심(막 11:15-25) / 서명철 목사

고난주간 첫째 날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두 번째로 청결케 하셨습니다. 이 사건 바로 직전에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 있었는데 이 두 사건은 모두 심판 주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동일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예루살렘 멸망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예배는 실종되고, 형식적인 종교의식만 남은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종교의 본질인 생명과 선과 의는 상실하고, 전통과 종교의식만 남은 것이 주님 당시 유대교의 실상이었습니다. 성전 정화사건은 마땅히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질된 것을 보시고 성전의 파산을 선언하신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은 두 번입니다. 첫 번째는, 공생애 초기인 요한복음 2장 13절 이하에 나오며, 두 번째는 공생애 마지막 기간인 고난주간 월요일에 있었습니다. 첫 번째 성전 정화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전 안에서 가축을 매매하고 돈을 환전하는 자들로 들끓었던 것을 볼 때 당시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적 처소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지 어떤 경우에도 더럽혀져서는 안 되며 거룩하게 유지되고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뜻입니다.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장차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허용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신 성전을, ‘도둑의 소굴’, ‘강도의 굴혈’로 만든 것이 어찌 예레미야 시대나 예수님 당시뿐이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교회들 역시 기독교 정신이 사라지고, 기독교 전통만 남았습니다. 한국교회가 행여 강도의 소굴이라는 비난의 도마에 올려져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과 교회를 돌아보는 고난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들도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둘째 날 : 권위(막 11:20-33) / 서명철 목사

고난주간 첫 날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며 두렵고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이어 “하나님을 믿으라”(22절)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기도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씀이며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기도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면 응답받지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저주와 그 결과로서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사건에 이어서 이처럼 기도의 능력에 대해 가르치신 것은 당시 제자들에게 가장 긴급하게 필요한 것이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초대교회를 이끌고 나가야 할 지도자로 남게 된 제자들에게 가장 긴급하게 필요했던 것은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기도에 대한 교훈은 마가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의 고난받는 성도들은 물론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꼭 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으면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으며, 응답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화목해야 합니다(마 5:23, 24). 사도 바울 역시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3, 14)고 하였습니다.
둘째 날은 예수님께서 고난주간 중에 가장 많은 일을 하신 날로서 예수님은 대적하는 사람들과 ‘권위’에 대해 논쟁하시기도 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산헤드린 공회가 허용한 성전 내에서의 제물 매매와 환전을 금하느냐고 추궁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신적 권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으며, 인간의 모든 권위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작은 권위라도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주님과 함께 기쁨으로 담대히 지고 나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
니다.

셋째 날 :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고전 5:7-8) / 장석남 목사

성경은 예수님의 수요일 행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매일 예루살렘 성전을 가셨던 예수님께서 수요일에도 예루살렘 밖에 있는 베다니 마을에 머무신 것으로 추측됩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전통에 따라 부정 타지 않는 유월절 만찬을 하기 위해 유월절 일주일간을 특히 조심했습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 예수님과 제자들도 유월절을 앞두고 일주일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유월절 전 일주일간은 특히 누룩, 곰팡이 등을 치우고 집안을 대청소하는 기간으로 삼았습니다. 유대인과 매우 관련이 깊은 누룩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눅 12:1). 바리새인들의 처음은 위대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에게는 종교적인 형식과 절차만 남고 율법의 정신은 사라져버렸습니다. 바리새인의 위선을 누룩에 비유한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파에게 뼈아프고 치명적인 공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앞두고 누룩을 제거하듯이, 바리새파의 영향력을 제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룩의 특징은 부패성, 큰 파급효과, 구별불가성 입니다. 주님은 바리새파와 누룩을 동급으로 보시며 제자들에게, 또 오늘 우리들에게 바리새파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묵은 누룩은 단절하지 못한 과거의 악한 습관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어린양,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새 덩어리가 되게 하셨으니 다시는 부패하지 않도록 변질된 누룩, 상한 누룩을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성취된 무교병에 참여한 자들은 더 이상 누룩 있는 떡을 먹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전 5:8).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은 묵은 누룩으로 변질되지 않은 새 덩어리, 새 떡을 의미합니다. 순전함은 동기의 순수함을, 진실함은 행동의 순수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었고, 영화로운 하늘의 은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옛것은 버리고 오직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는 성도의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말씀-4-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는 누룩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더럽혀진 것은 없습니까? 우리는 고난주간을 보내며 마음과 관계와 주변을 돌아보며 혹시라도 우리 안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영적 누룩을 깨끗이 제거해야 하겠습니다.

넷째 날 : 성목요일에 행하신 주님의 교훈 (마 26:36-46) / 장석남 목사

주님은 유월절에 만찬 할 장소를 확인하러 두 제자를 따로 보내시며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곳에서 서로를 섬기는 교회의 본을 세우시고, 성만찬의 규례를 제정하시고, 새 계명을 가르치셨습니다.
I. 주님의 세족식-서로에게 종 노릇 하라
주님께서는 식사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는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러면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고 요청하고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욕한 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죄 사함을 받은 자, 성령 세례를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II. 최후의 만찬-주님의 십자가를 기념하라
예수님은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찢기시고 피 흘리시고 죽으심을 분병과 분잔을 함으로 상징적으로 알려주시고, 장차 이 성만찬을 재연하면서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을 기념하라고 하시며 성례전으로 제정하여 주셨습니다.
III. 고별 설교-서로 사랑하라
이어서 주님은 고별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 설교는 주님의 마지막 유언이자 새 계명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요 13:34-35).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 곧 구원의 길을 알려주셨
습니다(요 14:6).
VI. 겟세마네 기도-이 기도를 본 받으라
성만찬을 끝내신 예수님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의 마지막 종결 장소로 겟세마네 기도처를 찾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곳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마지막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던 곳이 기도처였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역이 기도였음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은 홀로 기도하셨고, 겸손히 기도하셨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셨고, 끈질기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순종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완성은 하나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다섯째 날 : 유대인의 왕(마 27:11-14) / 조원영 목사

예수님은 금요일 새벽에 체포당하시어 곧바로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산헤드린 앞에서 성전 모독죄로 재판을 받으십니다. 이후 이 사건은 빌라도에게 이첩되었다가 헤롯을 거쳐서 다시 빌라도 법정으로 되돌아 왔고,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을 언도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12시에는 어둠이 온 땅을 뒤덮었으며 오후 3시 마침내 운명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맞이하기 위해 서둘러 예수님을 묻어야 했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마 26:2).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실현되는 것을 막고자 했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유월절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결국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대로 진행됩니다. 빌라도 법정의 재판은 예수님의 무죄함을 확증하고, 예수님의 왕권을 행사하는 자리였습니다. 빌라도는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그에게 넘겨준 것은 시기와 미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그의 아내가 보낸 메시지를 통하여 예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요구할 때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사형 언도를 내리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선언했고, 백성들은 예수의 피를 그들과 자기들의 후손이 책임질 것이라고 함으로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시인합니다. 본문에는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 라는 호칭이 두 번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성격을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대답하시며 자신의 왕권을 행사하십니다. 이는 산헤드린 법정에서 모든 고소에 대하여 완전히 침묵하셨던 예수님의 모습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멸시와 고난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유대인의 왕으로 왕권을 행사하셨습니다.
당시 기득권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생명력과 경건의 능력은 없고, 경건의 모양만 남아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우리의 왕’이십니다.

여섯째 날 : 힘대로 굳게 지키라(마 27:62-66) / 조원영 목사

고난주간 토요일 예수님이 무덤에 계실 때,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대응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두 종교 그룹, 곧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이 일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서로 반목과 질시의 대상이었던 양 집단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그것도 안식일에 이런 일을 펼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이었고 유월절 절기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능동적으로 빌라도에게 나아간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하여 그들의 불안감이 증폭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다시 살아나리라’는 예수님의 평소 발언에 대해 대단히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예수님께 직접 들었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는데, 오히려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은 간접적으로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음에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게 될 것을 우려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완벽하게 봉쇄할 것을 빌라도에게 요구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세력이 약해지고,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의 수가 더 늘어날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후까지도 한결같은 모함과 음모와 간계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대척되는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고난주간 토요일 무덤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리고 곧이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초자연적인 부활을 보이십니다. 죽어야 살고, 낮아져야 높아진다는 기독교의 역설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인간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고,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언대로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비하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맛보셨으나, 몸이 썩지 않으시고, 사망에 종노릇 하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예수님은 인간의 문제와 신령한 문제에 대해 동서고금의 모든 학자보다 빛을 더 많이 비추셨습니다. 그분은 웅변을 배우지 않으셨지만 전에 들어본 적 없고, 앞으로도 듣지 못할 전무후무한 생명의 말씀을 하셨고, 그 어떤 강연자나 시인도 끼칠 수 없는 영향을 온 세상에 끼치셨습니다.

요약 정리 : 허숙 권사(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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